[#하루천자] (114) 메밀꽃 필 무렵 ③… 달밤에 맞춤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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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7.09 04:00
‘하루천자로 고전(古典) 읽기’는 미증유의 사태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고전을 골라서 수회에 나눠 필사하는 캠페인입니다.

이번 주 필사감으로는 일제강점기 작가·언론인·수필가·시인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골랐습니다. 1936년 〈모밀꽃 필 무렵〉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입니다. 서사 방식에서 상당량의 묘사를 사용하면서도 그 수준이 높아 필력만으로 한국 소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듣기도 합니다. /편집자 주

이효석은 3편의 장편과 60여 편의 중편, 80여 편의 단편 등 많은 소설 작품을 발표하였고, 희곡과 시, 수필까지 발표하는 등 문학 전반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이러한 작품 세계는경향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나뉘고 있는데, 그 분수령이 되는 작품은 1933년 작 〈돈〉이다. 1928년 경부터 1932년까지의 ‘전기’에는 식민치하 어두운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하여 사회 병리현상을 비판·고발·저항하는 경향주의적인 작품들을 발표한 반면, 1933년부터 1942년까지의 ‘후기’에는 전기의 동반작가에서 탈피하여 변신했다. 이효석은 이 시기에 순수문학으로 돌아서서 개성적이며 예술성 짙은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지향한다. 위 그림은 조선일보 이철원 기자의 일러스트.
메밀꽃 필 무렵 ③ (글자수 783, 공백 제외 589)

일신에 가까운 것이라고는 언제나 변함없는 한 필의 당나귀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꼭 한번의 첫 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번의 괴이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나 그것을 생각할 적만은 그도 산 보람을 느꼈다.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두 도무지 알 수 없어."
허 생원은 오늘 밤도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조 선달은 친구가 된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렇다고 싫증은 낼 수도 없었으나 허 생원은 시치미를 떼고 되풀이할 대로는 되풀이하고야 말았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 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 단어 풀이
- 흔붓이 : 흐뭇하게
- 대공 : ‘대’의 방언
- 확적히 : 確的-, 어떤 사실이나 증거가 확실하여 틀림이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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