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천자] (121) 김약국의 딸들 ④… 그래도 새롭게 살아갈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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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7.17 04:00
‘하루천자로 고전(古典) 읽기’는 미증유의 사태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고전을 골라서 수회에 나눠 필사하는 캠페인입니다.

이번 주 필사감으로는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박경리(朴景利, 1926~2008)의 대표 장편소설 중 하나인 《김약국의 딸들》(1962, 을유문화사)을 골랐습니다. 어린 시절 작가 자신이 살던 마을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여 생생하게 되살려, 한 집안이 어떻게 몰락해가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비극의 장엄한 교향곡’입니다. 발표 당시에도 큰 인기를 누렸을 뿐 아니라, 30년 뒤 재출간되었을 때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작품을 함께 감상하고 필사해 보세요. /편집자 주

박경리는 《김약국의 딸들》에서 얼킨 욕망과 운명에 의하여 지방의 유족한 한 가정이 몰락해가는 과정과, 한말(韓末)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이르는 사이에 부(富)가 신흥세대로 이동하는 사회적 변동을 펼쳐냈다. 욕망의 엇갈림, 부의 사회적 이동과 여성의 운명이 한데 어울려, 한 집안의 몰락이 지닌 비극성이 사실적으로 조명된 역작을 탄생시켰다. 위는 조선일보 이철원 기자의 일러스트.
김약국의 딸들 ④ (글자수 862, 공백 제외 652)

새까맣게 탄 얼굴로 김약국은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맑은 눈이다. 의식도 분명한 듯하였다. 그의 눈은 흐느끼고 있는 용혜로 향하고 있었다. 노오란 머리칼이 물결친다. 김약국은 오래오래 용혜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천천히 이동한다. 시원하게 트인 이마만 보이는 고개 숙인 용빈에게 옮겨 간 것이다. 용빈은 김약국의 시선을 느끼자 얼굴을 들었다. 오열과 같은 심한 떨림이 그 눈 속에서 타고 있었다.

(중략)

정국주에 맞장구를 치는 사람은 때 묻은 옥양목 두루마기에 모양이 찌그러진 갈색 모자를 쓴 서 영감이다. 그는 수시로 눈이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옛날에도 시선이 분주한 사람이기는 했으나 용옥이 죽은 후론 그 버릇이 한층 심해진 것이다.
"아암, 그렇고말고요! 아까운 선비였지. 남 못할 짓 한 번 안 허고 꼬장꼬장하게 살았는데 하늘도 무심하셨지……."
사돈 김약국을 치켜야만 속죄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슬픔에 잠겨야만 자기가 지닌 비밀이 보장되는 듯, 그러면서도 시선은 산란하게 오가기만 하고 아들과 마주치기를 극력 피하기만 한다.

장대 너머 공동묘지에 김약국을 매장한 뒤 용빈은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정리라 해야 묵은 집 한 채와, 살림 부스러기뿐이다. 빚은 토지와 어장으로 상쇄된 모양으로 빚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중략)

"큰어머니, 안녕히, 안녕히 계시이소."
용빈과 용혜는 손을 흔들었다. 배는 서서히 부두에서 밀려 나갔다. 배 허리에서 하얀 물이 쏟아졌다. "부우웅." 윤선은 출항을 고한다. 멀어져가는 얼굴들, 가스등, 고함 소리. 통영 항구에 장막은 천천히 내려진다. 갑판 난간에 달맞이꽃처럼 하얀 용혜의 얼굴이 있고, 물기 찬 공기 속에 용빈의 소리 없는 통곡이 있었다. 봄이 멀지 않았는데, 바람은 살을 에일 듯 차다.

* 단어 풀이
- 윤선 : 輪船, 수레바퀴 모양의 추진기를 회전시켜 움직이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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