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정호승 시를 강병인 쓰다’ 이 책은

읽을 때마다 입술을 타고 들어와 가슴 속 감성을 울리는 시집. 그리고 볼 때마다 눈과 뇌리에 깊이 박힐 인상을 주는, 아름다운 캘리그라피(멋글씨)가 만났다. 한국 문학계를 빛낸 시인과 한국 대표 글씨 예술가의 합작이다.

문정희 시인의 시집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와 정호승 시인의 시집 ‘꽃 지는 저녁’을 강병인 작가가 쓴 ‘강병인 쓰다’가 11월 출간됐다.

 꽃 지는 저녁, 정호승 시를 강병인 쓰다 / 파람북
꽃 지는 저녁, 정호승 시를 강병인 쓰다 / 파람북
강병인 작가는 서예와 한글에 디자인을 입힌 멋글씨를 대중화한 선구자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상품, 대형 행사장의 배경, 영화 포스터 속 글씨와 기업 로고 등이 그의 작품이다. 한글의 창제 원리를 철학으로 삼아 한글 글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큰 가치와 변화를 가지고 있는지 알려온 작가이기도 하다.

문정희, 정호승 시인과 함께 ‘강병인이 쓴다’를 만든 강병인 작가를 만나 다섯가지 질문을 던졌다.

Q1. 시와 글씨의 만남, 이 책을 어떻게 구상하셨나요?

-출판사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처음에는 시집 한권정도만 글씨로 옮길 생각이었지만, 역으로 제안을 했다. 시인마다 한권의 책을 골라 글씨와 함께 만들자, 평생 많은 시인의 시를 글씨로 옮기자는 생각에 의기투합해 이번 책을 만들었다.

Q2. 글씨로 옮길 때, 시마다 주는 느낌이 다를 듯합니다. 쓰면서 가장 따뜻한 마음이 들었던 시는 무엇이었나요?

-첫권이 문정희 시인의 시집이다. 강렬한 이야기가 많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는 시가 와 닿았다. 많은 이들이 눈이 오면 눈송이 이야기를 한다. 어릴적으로 돌아간다. 우리 글자에는 ‘하늘아’라는 홀소리가 있다. 흔히 ‘아래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하늘아다. 이를 획이 아닌 ‘점’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늘이 둥글기 때문에 ●이다. 그리고 ●은 선으로 변했다. 이를 선이 아닌 다시 처음 모양인 ●으로 표현하여 눈송이를 연상도록 했다. 이 시의 시어와 시인의 시적 감정이 눈송이라는 시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듯, 글씨로도 이를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글자가 처음 만들어진 원리나 형태 안에서 눈송이를 표현할 수 있는 문자는 한글밖에 없을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시는 희망을 노래한다. ‘몸’이라는 시가 있다. 겨울에 강이 얼면 한덩어리의 몸이 된다는 것을 노래한 시다. 몸이라는 글자를 분석해보면 재미있다. ‘ㅁ’이 두개다. 뒤집어도 비슷한 글자가 된다. 형태를 유지한다. 그래서 이 ㅁ을 두고 다양한 발상을 해 봤다.

ㅁ를 몸이라는 글자 바깥에 그리고, 초성 ㅁ과 종성 ㅁ 안에도 또다른 ㅁ을 넣어봤다. ㅁ이란 글자도 시에 나오는 강처럼 ‘한 몸’이 되는 셈이다. 사람과 사람, 생각과 생각, 마음과 마음이 한덩어리가 된다. 그러면서 또 완전히 가둬진 것은 아니다.

글과 글자가 만나 또 다른 이야기와 시어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모든 시가 중요하지만, 이 몸이라는 시가 특히 재미있었다.

Q3. 시를 글씨로 옮길 때 생겼던 고민, 어려움 등 출간 시 기억에 남았던 일을 귀뜸해주세요.

-정말 힘들었다. 시를 글씨로 옮기기 전, 시에 희노애락이 들어있는 것처럼 글씨도 희노애락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시인의 시를 평소에도 알고 있었던지라 금방 글씨로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작업하는데 2년쯤 걸렸다.

글씨를 다 써놓고 마음에 들지 않아 서너번 다시 썼다. 감정이입이 안 돼서 작업 맨 처음부터 되풀이하기도 했다. 모든 시는 제목과 내용이 다르기에, 똑같은 글씨로 쓸 수는 없다. 시에 맞는 글씨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시의 내용, 그 내용을 함축한 핵심 시어를 찾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데, 시를 읽다 보니 놀라운 발견을 했다. 문정희 시인의 시는 한 대목을 따로 떼어 봐도 그 자체가 하나의 시가 된다. 그래서 책 왼쪽에는 시의 중간 대목을 떼어 배치했다. 온전히 봐도, 따로 떼어 봐도 시가 된다는 것을 표현했다. 한편의 시에서 시 열편을 본 경험을 했다. 이를 깨닫고 나서 작업을 시작하니 편해졌다. 문정희 시인도 놀라운 발견이라고 즐거워했다.

정호승 시인의 책을 만들 땐 문정희 시인과 다른 발상을 했다. 시의 ‘한 단어’에만 집중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어에서는 ‘외’에 집중했다. 외롭기에 ‘외’를 외롭게 써 봤다. ‘달팽이’라는 시는 달팽이를 닮은 글씨로 썼다. 글자 서체를 시어에 맞게 정했다.

또, 큰 제목에는 종성만 써 놨다. ‘달팽이’라는 시를 ‘ㄹㅇㅇ’로 표현했다. 종성이 있고, 나머지 초성과 중성은 독자가 스스로 상상하고 채울 수 있도록 글자 곳곳을 빈 칸으로 배치했다. 글자 자체를 비워두기도 했다. ‘꽃같은 놈’이라는 시어는 ‘ = 놈’으로만 표현했다.

‘꽃 = 놈’이면 ‘꽃같은 놈’이 되는 셈이다. 독자가 스스로 생각한 단어를 넣어볼 수 있게 장치를 넣었다. 시를 다르게 해석하고, 빈 곳을 채우며 시의 의미를 더 깊게 음미할 수 있도록 했다.

Q4. 캘리그라피, 예쁜 글씨를 쓰고 싶어하는 분들께 도움이 될 말을 주실 수 있을까요?

-캘리그라피보다는, 순 우리말 ‘멋글씨’가 어울린다. 예쁘고, 멋만 부리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 예술을 의미하는 ‘멋’에 글씨를 붙여 멋글씨로 부르는 것이 더 좋겠다.

글씨를 잘 쓰려면 공부해야 한다. 서예는 기본이고 디자인의 표현 방식도 알아야 한다. 세상의 움직임을 자신만의 눈으로 분석하는 법, 많은 경험도 쌓아야 한다. 좋은 글씨를 쓰려면 글이 가진 뜻을 자기만의 해석으로 이해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글씨를 쓸 때, 뭔가를 글씨로 옮길 때 내 글씨가 아니라 남의 글씨가 된다.

좀 더 글씨를 예쁘게 쓰려면 가독성을 높여라. 한글은 가독성을 높이기 쉽다. 초성, 중성, 종성 등 소리를 세 음절로 나눈 문자다. ‘책’을 예로 들면 ‘초성 ㅊ’ ‘중성 ㅐ’ ‘종성 ㄱ’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우리는 한글을 가르칠 때 가갸거겨로만 가르친다. 이에 흔히 초중종성을 모두 붙여서, 흘리듯 글씨를 쓴다. 초중종성을 모두 떼어 쓰기만 해도 가독성이 높아진다. 사실 글씨를 흘려만 쓰면 가독성도, 품격도 떨어진다.

한글의 제자 원리, 초중종성을 나누고 합하는 훈민정음의 원리를 이해하라. 초중종성은 각각 하늘과 땅, 사람의 관계다. 이 관계를 뚝뚝 떼어놓은 후 조금씩 좁히면 아주 좋은 글자가 된다. 공간을 좁히고 넓히면서 사람의 마음, 사람의 소리를 이해할 수도 있다.

시집 끝에 부록처럼 내가 강조하는 글씨에 대한 태도, 뜻문자 한글 이야기를 실어뒀다. 한글이 만들어진 원리도 써 놨으니 참조했으면 한다. 예쁜 글씨에서 더 나아가 쓰는 사람의 마음과 여유, 자연의 형상, 마음을 제어하고 표현하는 ‘더 좋은 글씨’를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Q5. 글씨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실 것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글씨를 쓴 지 20여년이 넘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렸다는 생각에, 원래 올해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스스로 유배를 갈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광화문 현판 교체 운동에 나섰다. 기존 현판 문제에 문제가 있어, 이를 훈민정음체로 바꾸자는 운동을 했다. 이 바람에 유배를 못 갔다.

2021년에는 유배를 갈 것이다. 글씨를 위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20년 전에는 서예, 디자인계가 한자만 인정하고 한글은 다소 홀대했다. 취미생활 정도로 치부하고 예술적 가치를 낮게 봤다.

20년간 가진 목표가 ‘우리말이 고운 만큼 한글도 충분히 곱고 아름답다. 한자 못지 않은 조형성과 독특함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한글의 예술적 가치를 알고 있는 뜻있는 분들과 함꼐 노력한 결과 서예 및 디자인 업계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고, 나름의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또다른 글씨를 보여주려면 공부해야 한다. 2년쯤 공부하겠다. 한글을 어떻게 새로 해석하고 발전, 가꿀 것인지 고민할 것이다.

글씨도 바뀔 것이다. 2년 후에는 작품에 한글 이야기가 빠질 수도 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홈페이지 표어가 ‘한글의 아름다움이 보일 때까지 나의 붓은 춤추리라’라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이제는 예술적 가치를 넘어서는, 글씨가 하나의 예술성을 갖춰 그 가치를 한 단계 더 끌어 올려 글씨의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정희·정호승 시를 강병인 쓰다' 강병인 저자 5Q 인터뷰 / 촬영·편집 차주경 기자

저자 강병인은

1962년 경남 합천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한글 서예를 접했다. 디자인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서예와 디자인을 접목한 캘리그라피를 개척했다. 뒤늦게 공부를 하여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전통과 현대의 융합, 재해석으로 한글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앞장선 예술가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독립열사 말씀, 글씨로 보다’ 순회전 등 개인전시 16회, 국립현대미술관 ‘미술관에 書 : 한국 근현대 서예전’ 등 130여 회의 그룹전에 참가했다. ‘글씨 하나 피었네’, 그림책 ‘한글꽃이 피었습니다’ 등 책도 수 권 냈다.

한글의 디자인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확장해온 노력을 인정받아 2009년 한국출판인회의 선정 올해의 출판디자이너상을 수상하고, 2012년 대한민국디자인대상 은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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