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을 시작으로 암호화폐 시장이 또 한 번 호황을 누리고 있다. 지난해 말 주요 암호화폐 시세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암호화폐 채굴 시장도 덩달아 호황이다. 세계 그래픽카드 물량이 대규모 채굴장이 즐비한 중국, 러시아 등으로 빨려 들어가는 상황이다. 이른바 ‘3차 채굴 대란’이다. 최대 성수기인 졸업 및 입학 시즌을 맞은 PC 업계 입장에서는 초대형 악재다.

조립 PC 업계는 반쯤 마비 상태다. 핵심 부품인 그래픽카드의 가격이 최신 제품인 지포스 30시리즈를 중심으로 정가의 거의 2배 가까이 올랐다. 유튜브 등을 통해 입소문이 번지면서 소비자들도 지갑을 닫고 관망세에 들어갔다. 당장 PC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채굴 대란의 영향을 덜 받는 노트북이나 대기업 완제품으로 넘어가는 추세다.

‘채굴 대란은 2017년, 2018년에 이어 벌써 3번째다. 문제는 주요 그래픽카드 제조사는 물론, GPU 공급사인 엔비디아마저 여전히 조치 없이 사태를 방조하고 관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엔비디아는 그래픽카드의 핵심 부품인 GPU 공급을 중단함으로써 특정 제조사의 소비자용 그래픽카드가 채굴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입장이다. 그래픽카드 제조사 역시 의지만 있으면 자사 그래픽카드 공급망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다.

그러나 어디서도 엔비디아와 그래픽카드 제조사들이 채굴 대란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힌 곳이 없다. 암호화폐 시세가 오를수록 대규모 채굴 업자들은 웃돈을 주고서라도 채굴에 쓸 그래픽카드의 추가 확보에 나선다. 제조사들 역시 정상가로 일반 소비자 시장에 공급하는 것에 비해 더 많은 수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채굴 시장이 활성화된 중국에서는 공장에서 갓 출고된 그래픽카드 물량을 대형 트럭이나 컨테이너 단위로 싹 쓸어가는 ‘차떼기’도 흔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픽카드를 사용한 암호화폐 채굴 시스템의 예시 / IT조선 DB
그래픽카드를 사용한 암호화폐 채굴 시스템의 예시 / IT조선 DB
한술 더 떠 엔비디아는 또 한 번 ‘채굴 전용 GPU’ 생산을 검토하는 중이다. 암호화폐 소식통에 따르면 엔비디아의 최고재무책임자(CFO) 콜레트 크레스는 투자자들을 상대로 보낸 메일에서 "암호화폐 수요가 의미 있는 수준으로 나타나면, CMP 생산 라인을 재가동할 수 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CMP는 일반 GPU에서 영상 출력 기능을 제거하고 연산 기능만 남겨 처음부터 암호화폐 채굴에 최적화한 GPU다. 채굴용 GPU를 따로 만들어 공급하면 상대적으로 비싼 일반 소비자용 그래픽카드가 채굴 시장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왔다.

그러나 2차 채굴 대란 당시 투입됐던 CMP 제품은 그 역할을 제대로 못 했다. CMP만으로는 채굴업계의 수요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일반 소비자용 그래픽카드가 채굴 시장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CMP 제품은 채굴 붐이 끝나면 더는 쓸 데가 없어 폐기해야 하지만, 일반 소비자용 그래픽카드는 중고로 되팔 수 있다. 채굴업계 입장에서는 한 번 쓰고 버리는 CMP 제품보다 투자 비용을 어느 정도 회수할 수 있는 일반 소비자용 그래픽카드를 더 선호할 수밖에 없다.

엔비디아가 CMP 생산 라인 재가동을 검토한다는 것은, 지난 2차 대란 시절과 마찬가지로 이번 3차 대란에서도 GPU 판매를 통해 최대한 이익을 챙기겠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채굴 대란’이 발생하면 그 피해는 제품을 공급받아 시장에 공급하는 중소 유통사와 조립PC 제조업체,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유통사와 조립PC 업체는 물건이 없어 장사가 힘들어지고, 소비자들은 동일한 그래픽카드를 더 비싼 가격으로 사야 하기 때문이다. 채굴 대란이 끝나도 투입된 그래픽카드가 중고로 시장에 대거 풀리면서 유통 질서가 엉망이 되는 등 관련 업계에 상당한 후유증이 남는다. 이미 두 번의 ‘대란’을 거쳐 확인된 사실이다.

소비자들의 피해와 시장 혼란을 막으려면 엔비디아와 그래픽카드 제조사들이 ‘채굴 대란’을 마냥 방조하지 않도록 정부와 기관의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 소비자와 관련 업계의 피해를 막기는커녕 방조하는 것은 기업의 자유로운 영리 활동을 보장하는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서도 용납돼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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