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외산 놀이터 된 韓 크롬북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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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1.02.10 06:00
교육용 PC시장에서 크롬북이 화제다. HP, 에이수스, 에이서 등 글로벌 PC 브랜드들이 너도 나도 한국 크롬북 시장에 진출을 선언했다. 새판 짜기가 한창이다. 그 와중에 토종 크롬북은 안보인다.

크롬북은 구글이 개발한 크롬OS를 탑재한 클라우드 기반 PC다. 기기 자체에 앱을 설치하고 데이터를 저장하는 일반 PC와 다르다. 크롬북은 크롬OS만 담겨있고 모든 앱의 설치와 실행, 데이터의 저장은 구글의 클라우드에서 처리한다. 덕분에 가격이 저렴하고 유지관리와 업데이트가 간편해 미국을 중심으로 교육용 PC의 강자로 떠올랐다.

국내에서도 오래전부터 크롬북 시장이 조금씩 성장해왔다. 2014년 설립한 토종 스타트업 ‘포인투랩’이 자체 개발한 크롬북을 잇달아 선보이면서 국내 교육 시장에서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것. 신생 스타트업이지만 한국 토종 기업 중 구글의 인증을 받은 단둘 뿐인 크롬북 제조사 중 하나다. 다른 한 곳은 바로 삼성전자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미국에선 신형 크롬북을 꾸준히 선보이면서도 국내 시장은 무관심했다. 삼성은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국내 PC 시장에 저비용 고효율의 크롬북을 직접 출시하면 자사의 고가 프리미엄 제품군의 판매량 일부를 잠식할 것이라는 우려에 수익도 크게 기대할 수 없어 국내 출시를 미뤄왔다는 게 관련 업계의 분석이다.

즉, 국내 크롬북 시장은 지난 수년 동안 작은 토종 스타트업 혼자서 어렵사리 키워온 셈이다. 하지만 글로벌 거대 기업들의 잇따른 한국 시장 진출 선언에 이어, 에이서의 조달 시장 등록과 공급이 시작됨에 따라 국내 크롬북 시장은 순식간에 외산 브랜드에 통째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2017년 경기도교육청 산하 44개 중학교에 1600여대가 공급된 ‘포인투 크롬북 11C’ / IT조선 DB
조달청으로서는 급증하는 국내 교육 시장의 크롬북 수요에 대비해 안정적인 물량을 확보하고자 에이서의 국내 진출을 허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일선 학교에서의 교육용 크롬북 수요는 매년 급증하고 있지만, 포인투랩 한 곳만으로는 그 수요를 모두 충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규모의 생산력을 갖춘 외산을 통해서라도 크롬북 물량을 메울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에이서에 이어 글로벌 1위 크롬북 공급사인 HP 등이 진출해 압도적인 물량과 가격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하면 영세한 토종 스타트업으로서는 대응이 어려울 것이다. 삼성이 외면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고군분투 중인 국내 기업마저 밀려버리면 국내 교육용 크롬북 시장은 외산 브랜드들의 잔칫상으로 전락하는 상황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크롬북 역시 브랜드별로 저렴한 보급형 제품부터 일반 PC 뺨치는 고가 제품들까지 다양한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외산 브랜드들이 처음에는 중저가 제품으로 조달 시장에 진출하다가도, 경쟁하는 국내 기업이 사라지면 언제든 공급 제품을 고가의 비싼 제품으로 바꿔버릴 수 있다. 이를 제대로 못 막으면 ‘저렴한 가격’만 보고 크롬북을 도입한 일선 학교들이 기능과 비교해 비싼 고가의 크롬북을 강제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다.

외산 PC 브랜드의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사후지원도 걸림돌이다. 대다수 해외 PC 브랜드는 ‘글로벌 표준’을 들먹이면서 국내 평균보다 한 수 떨어지는 AS를 제공하는 상황이다. 까다로운 국내 소비자 및 사용자층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든다.

글로벌 PC 브랜드들이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크롬북 시장에 집중하는 이유는 ‘미래를 대비한 투자’로 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HP, 에이수스, 에이서 등의 외산 브랜드 제품을 친숙하게 사용해온 학생일수록 성인이 돼서도 자연스레 해당 브랜드의 고급형 PC를 찾을 가능성이 높다. 애플이 어떻게든 교육 시장에 가격을 낮춘 아이패드 신제품을 꾸준히 들이밀고 ‘컴퓨터가 뭔데요’라는 도발적인 광고까지 선보이는 것도 일찌감치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브랜드 각인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국산 크롬북의 품질이 외산보다 딱히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구글의 공식 인증을 받았다는 것은 기능이나 성능 면에서 구글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기준을 충분히 충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포인투랩의 크롬북 제품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도 수출되고 판매 중이다. 쟁쟁한 외산 브랜드 틈바구니에서도 나름의 경쟁력을 갖춘 셈이다.

무엇보다, 지난 수년 동안 국내 크롬북 시장을 홀로 키워온 만큼, 국내 교육 시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기업이기도 하다. 이런 토종 기업을 포기하고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크롬북 시장을 통째로 외산 브랜드에 넘기기엔 너무도 아깝다.

정부와 조달청은 외산 브랜드에 문호를 개방하는 한편, 국내 크롬북 시장의 외산 독점을 막기 위한 추가적인 보완책이 필요해 보인다. 쿼터제를 통해서라도 국산 크롬북의 판로를 보호하는 동시에, 뒷짐만 지고 있는 삼성의 국내 시장 진출을 독려할 필요가 있다.

삼성 역시 국내 크롬북 시장을 보호하고, 국내 PC 시장에서 브랜드 가치를 지키려면 당장 이익이 안 되더라도 대승적 차원에서 국내 크롬북 시장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지금처럼 방관만 하다가는 스마트폰은 물론, 미래의 PC 시장마저 외산 브랜드에 뺏겨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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