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엔비디아, ‘채굴 대란’ 즐기나

입력 2021.03.03 06:00

조립PC 시장이 개점 휴업 상태다. 폭등하는 암호화폐 시세와 그로 인한 채굴 대란 때문이다. 그래픽카드의 가격은 정상 출고가격의 거의 두 배 가까이 껑충 뛰었다. 오죽하면 그래픽카드가 부족하니 중국 현지에서는 지포스 RTX 30시리즈를 탑재한 게이밍 노트북까지 채굴장으로 끌려가는 신세다.

그런 가운데, 엔비디아가 최근 출시한 ‘지포스 RTX 3060’은 처음부터 채굴 시 성능 저하 기능을 추가하고, 채굴 전용 GPU를 따로 출시한다고 밝혀 화제로 떠올랐다. 마침, 거침없이 치솟던 암호화폐 시세 상승률도 한풀 꺾이면서 많은 소비자가 그래픽카드 가격 정상화의 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지포스 RTX 3060이 출시되면서 소비자들의 기대는 다시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온라인 오픈마켓을 통해 일부 초도 물량이 60만원 중반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초도물량이 동난 현재는 80만~90만원대까지 치솟았다. 시장 안정화는커녕, 오히려 현재 그래픽카드 시장이 정상이 아닌 것을 재확인하는 제품이 된 것이다.

물론, 최대 원인은 앞뒤 보지 않고 그래픽카드가 나오는 족족 웃돈을 얹어가면서 쓸어 담는 채굴 시장에 있다. 하지만, 엔비디아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이미 채굴 광풍이 불기 시작한 지난해 말부터, 채굴에 대비했다는 3060을 출시한 2월말 까지 아무런 조치 없이 방관만 한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주요 그래픽카드 제조사의 지포스 RTX 3060 제품들 / 엔비디아
엔비디아가 정말로 채굴 대란을 개선할 생각이 있었다면 최소한 채굴 광풍이 불기 시작한 지난해 말부터 각 제조사로 공급되는 GPU 물량을 모니터링하고, 채굴 시장에 그래픽카드 공급을 방조하는 제조사에 GPU 공급을 줄이는 등의 페널티를 주는 식으로 시장을 통제했어야 했다.

그래픽카드 제조사 입장에서는 아무리 채굴 시장이 매력적이고 이윤이 많이 남는다고 하더라도 엔비디아가 GPU 공급을 끊으면 꼼짝도 못 하고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실제로 과거 대표적인 지포스 그래픽카드 브랜드였지만, 엔비디아에 밉보여 GPU를 공급받지 못해 결국 AMD 그래픽카드로 업종을 변경한 ‘XFX’같은 브랜드도 있을 정도다.

게다가, 엔비디아는 이미 시가총액 기준으로도 IT 업계에서 손꼽는 규모로 성장한 거대 기업이다. 마음만 먹으면 애플처럼 주요 제조 파트너들의 제조 및 유통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제어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다. 그런데도 현재 그래픽카드 시장이 엉망이 된 것은 이 꼴이 될 때까지 엔비디아가 채굴 시장에 대해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모양새다.

사실 채굴 시장이 한창 잘 나간다 하더라도 엔비디아는 실제 얻는 것이 별로 없다. 엔비디아는 GPU를 공급하는 회사지, 실제 채굴이 가능한 그래픽카드 완제품을 공급하는 제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채굴 대란으로 돈을 버는 것은 엔비디아가 아닌, 그래픽카드 제조사들이다.

특히 엔비디아는 지난 2018년 2차 채굴 대란에 편승해 무리하게 GPU 물량을 대거 늘렸다가 암호화폐 시세 폭락으로 엄청난 재고를 떠안게 되어 회사가 위기에 몰렸던 아픈 기억도 있다. 아무리 채굴 대란으로 수요가 급증한 현 상황에도 이전처럼 GPU 생산량을 무작정 늘리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런데도, 엔비디아는 그래픽카드 시장을 통제하는데 또 한 번 실패했다. 이번 지포스 RTX 3060의 채굴 성능을 억제한 조치나, 채굴 전용 GPU를 새롭게 출시한 것도 그래픽카드 시장 컨트롤 실패를 무마하기 위한 면피성 전략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치가 효과를 보려면 최소한 두 달 전인 1월에 시행됐어야 한다. 즉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전형적인 뒷북 조치다.

지포스 RTX 3060의 채굴 억제 기능도 효과가 없어 보인다. 출시 며칠 만에 가격이 80만~90만원대까지 치솟았다는 것은 채굴업자들이 그 가격대로 구매한다는 것이고, 이는 3060의 채굴 성능 역시 그 가격에 살 정도로 채산성이 나온다는 의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미 채굴 시장에 투입된 지포스 RTX 3060Ti, 3070, 3080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후속 조치도 없는 상황이다. 물론, 이제 와서 드라이버를 통해 채굴 성능을 제한하더라도 우회할 방법은 많기 때문에 효과를 거두긴 힘들다. 그래도, 엔비디아가 현재 상황을 타개할 의지가 있었다면 해당 제품에 대한 최소한의 입장을 밝히거나, 후속 계획을 밝혔어야 했다.

분명 지포스 30시리즈 GPU는 역대급 성능으로 엔비디아의 기술력을 충분히 과시하는 제품으로 나왔다. 지난해에는 M&A 시장의 최대 매물 중 하나인 ARM 전격 인수를 선언하면서 업계의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자사의 주력 제품인 GPU와 그에 기반을 둔 그래픽카드 시장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기술만 발전했을 뿐 ‘IT 업계를 선도하는 리더’로서의 역량은 아직 부족해 보인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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