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100억달러(11조4000억원) 이상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증설하려는 삼성전자의 고심이 깊다. 기록적 한파로 텍사스주 오스틴 공장 가동 중단이 장기화 한 것이 변수로 등장했다. 삼성전자가 증설 유력 후보지인 오스틴시에 요구 조건을 추가로 제시할 수 있고, 다른 후보지도 검토 대상에 오른 만큼 투자 계획이 지연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9일 반도체 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삼성전자 오스틴 공장은 2월 16일부터 한파로 가동을 중단했고 정상화까지 최소 수 주가 더 소요된다. 설비 복구가 4월 중하순이 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전경 / 삼성전자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반도체 공장 전경 / 삼성전자
오스틴 공장이 가동을 멈춘 것은 1998년 공장 설립 후 처음 있는 일이다. 삼성전자는 공장 셧다운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고, 가동 재개 시점을 최대한 앞당기기 위해 오스틴 공장으로 기술진을 급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오스틴 공장 2020년 하루 평균 매출이 107억원쯤인 것을 감안하면 현재까지 공장 가동 중단에 따른 피해 규모는 2000억원을 훌쩍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김양재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설비 복구 이후 반도체를 다시 생산하기까지 2~3개월은 더 걸릴 것이다"라며 "5월쯤 정상 가동한다고 가정하면 1조원쯤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오스틴 공장 가동 중단이 장기화 한 가운데 로이터통신은 3일(이하 현지시각) 삼성전자가 신규 반도체 공장 부지 후보군을 넓혔다고 보도했다. 삼성전자가 텍사스주에 2월 26일자로 새로 제출된 문서를 인용해 오스틴 이외에도 애리조나주 2곳, 뉴욕주 1곳을 후보지로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다른 후보지가 재차 거론된 것은 3주 가까이 가동이 중단된 오스틴 공장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한파로 전력·용수 공급망이 붕괴된 오스틴의 상황은 파운드리 증설 시 초기비용 증가로도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삼성전자가 제출한 문서에 따르면 회사는 오스틴시와 트래비스 카운티에 향후 20년간 총 14억8000만달러(1조6800억원)에 달하는 세금감면 혜택을 요구했다. 이는 2월 텍사스주 문서를 통해 알려진 세금감면 요구액 8억550만달러(9200억원)보다 늘어난 금액이다. 텍사스주 규정상 기업에 대한 재산세 감면 혜택은 최장 10년까지 가능한데 20년간 세제 혜택이 협상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2월 오스틴 측에서 먼저 자료 보완 요청을 해 제안서 수정본을 제출했다"며 "일부 표현이 바뀌었을 뿐 내용상 변화는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 차량용과 스마트폰용 반도체 수급 현황이 좋지 않다. 수요가 늘어나는 것을 공급이 따라가질 못한다. 미국과 유럽 등은 첨단 기술을 가진 반도체 업체를 경쟁적으로 유치 중이다. 세계에서 10나노 이하, 5나노급 반도체 제조 기술을 유이하게 보유한 대만 TSMC와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공장 투자는 반도체 업계의 가장 큰 관심사다.

TSMC는 최근 2021년에만 280억달러(31조원)를 설비투자에 쓴다고 발표했다. 앞서 2020년 5월에는 120억달러(13조원)를 투자해 2024년까지 애리조나에 5나노 공정 라인을 완공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2일 애리조나주 지역 매체인 ‘피닉스 비지니스 저널’에 따르면 TSMC는 애리조나주 피닉스시 인근에 짓고 있는 공장 투자 규모를 당초 계획보다 3배 키운다. 투자액은 기존 발표한 120억달러에서 3배로 불어난 350달러(39조원) 수준이다.

애리조나 주정부는 TSMC 반도체 공장의 용수 공급을 보장하고, 추가로 2억500만달러(2300억원)를 지원할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TSMC를 제치고 시스템반도체 글로벌 1위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2020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 17%로 TSMC(54%) 대비 크게 뒤처져 있다. 파운드리 1위인 TSMC가 미국 투자에 선수를 치면서 삼성전자의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5나노 공정에서 밀린 삼성전자는 2021년 3나노로 승부를 걸어야 하는데, TSMC의 공정개발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격차를 좁히는 것이 녹록지 않다"며 "슈퍼사이클에 대응 및 고객사 선점을 위해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만큼, 삼성전자가 적기에 투자를 결정해 돌파구를 찾아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