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27) 섭정을 받는 청 황제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4.16 23:00

    [그림자 황후]

    1부 (27) 섭정을 받는 청 황제

    경복궁 교태전.
    장인의 정교한 기예가 느껴지는 화각장이 방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벼루를 넣는 연상(硯箱)은 각도에 따라 다른 빛깔을 내는 나전을 박아넣은 것이었다. 유난히 글을 좋아하는 중전의 취향을 세련되게 보여주고 있었다.
    중전은 초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초계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 왕궁에는 조선의 내로라하는 미색들이 한둘이 아니건만, 초계는 이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았다. 향이 진하고 화려한 해당화 같았다.
    "초계야."
    "예 중전마마."
    초계는 이쁘장한 외모와 달리 목소리는 사내처럼 굵고 쉰듯했다. 어려서부터 소리를 해서 그런 것이리.
    "너도 이제 지아비를 맞아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
    "예?"
    초계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숨이 턱 막혔다.
    "너를 측실로 삼고 싶다는 자가 한둘이 아니지 않느냐. 이번에는 거절하기 어려운 자리가 들어왔다."
    "마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초계는 비록 종이지만 어려서부터 한집에 자라 정이 남달랐다. 초계의 특출난 재기가 안타깝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왕대비의 조카가 민승호를 통해 말을 넣었기 때문이다.
    "마마! 측실로 살 바에야…"
    초계는 목에 칼을 넣은 것처럼 아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죽기라도 하겠다는 게야?"
    중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측실이라고는 하지만 편하게 살 수 있을게다. 비단옷 입고 좋은 집에서 편히 살려무나. 내 섭섭지 않게 보태 주겠다."
    초계의 앙다문 이빨 사이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마! 저를 면천시켜주십시오!"
    "뭐라? 난데없이 면천은 무슨 소리야! 귀여워 해주었더니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면천만 해주신다면 중전마마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사옵니다!"
    "진실로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게야?"
    "예 마마!"
    초계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나를 위해 꽃도 되고, 독수리도 되고, 지렁이도 될 수 있느냐?"
    "예 마마!"
    "측실로 가는 건 없던 일로 하겠다. 면천은 두고 봐서 해줄 터이야."
    "중전마마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을 것이옵니다! 흑흑!"
    "그만 눈물은 거두거라. 네가 주제넘게 왜학을 배우고 있다고 들었다. 왜학은 무엇하러 배우는 게야?"
    중전의 서사상궁이 된 강 상궁은 봉서 심부름을 다니는 초계와 친해졌다. 초계가 역관인 강 상궁의 사촌 형부를 통해 왜어를 하는 역관을 소개받았던 것이다.
    "마마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외람되게도 한문은 마마가 배우실 때 어깨너머로 쪼금씩 익혔사옵니다. 그냥 왜학을 해두면 좋을듯 싶어서요."
    "쯧 골치 아픈 종자로다."
    그러나 중전은 왜학을 그만두라고 하진 않았다.


    초계는 민승호를 따라 여주로 갔다.
    중전의 분부로 청나라에서 온 태웅을 한양으로 데려오고, 태웅이 가져온 서책의 책 제목을 써오라는 분부였다. 중전은 태웅이 가져온 서책을 소문나지 않게 잘 싸서 가져오라고 명했다.
    "연경에서 상해로 옮겼다지. 잘 배우고 왔느냐?"
    민승호는 태웅의 절을 받고 물었다.
    그 사이 태웅은 훌쩍 커서 청년의 티가 났다.
    "예."
    콧수염이 예쁘게 돋기 시작한 태웅은 먼길을 와서인지 구릿빛이었다.
    태웅은 한쪽에 앉아있는 초계를 발견했다. 작은 얼굴에 커다란 눈과 유난히 크고 촉촉한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한창 이성에 관심이 폭발하는 나이인 태웅은 초계의 도도해 보이기까지 하는 미모에 자꾸 눈이 갔다.
    "가져온 서책들은 여기 초계한테 빠짐없이 잘 넘기도록 해라. 중전께서 널 보자고 하시니 하루 이틀만 묵고 한양으로 가야겠다."
    민승호는 모처럼 여주에 와서 만나자고 기별을 넣는 사람이 많은데 아쉬웠다.

    방으로 들어온 태웅은 팔베개를 하고 벌렁 드러 누었다.
    한양으로 가, 중전마마를 뵙는다고?
    입궁을 한다니 떨리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태웅은 자꾸 초계의 얼굴이 떠올랐다.
    누굴까.
    "초계입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태웅은 초계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초계가 잠시 눈을 들어 바라보자 태웅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초계는 연경과 상해에서 가져온 책들의 제목을 베끼기 시작했다. 붓을 잡는 모양이나 종이에 쓰는 글씨가 능숙했다. 책을 들여다보는 눈빛이 진지하고, 가끔 눈을 반짝이며 한참을 읽어내려갔다.
    태웅은 초계의 오똑한 콧등, 커다란 눈망울과 짙은 눈썹의 옆 모습을 훔쳐보았다. 이슬을 머금은 장미꽃잎처럼 도톰하고 촉촉한 입술이 태웅을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1872년 경복궁 자미당.
    "공친왕이 서양 오랑캐를 불러들여 안으로는 국가를 좀먹게 하였는데, 신하나 백성 중에 분하고 원통해 하는 사람은 없었소?"
    왕은 사행을 다녀온 서장관 박봉빈을 불러 청국 사정에 대해 물었다.
    공친왕은 청나라 황제 동치제의 숙부로, 어린 황제를 대신해 섭정에 나선 자였다. 동치제의 생모 서태후가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왕은 자신보다 네 살 어린 동치제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은 열두 살, 동치제는 다섯 살이란 어린 나이에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는 점도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섭정을 받고 있었다.
    "조야의 모든 사람들이 격분하여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왕이 묻자 박봉빈은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왕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중국의 인심은 전에 비해 어떠했소?"
    "몇 년간 공친왕이 권세를 부린 이래 백성들이 도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만약 황제께서 직접 정치를 하신다면 마땅히 회복되어 소생할 것이라고들 합니다."
    왕의 표정이 밝아졌다.
    "청국의 법령이 전에 비해 해이해졌다고 하는데 어떠하오?"
    "황제는 뛰어난 슬기와 더없이 현명한 자질을 갖추셨습니다. 게다가 부지런히 학문을 연마하시고 법령을 엄히 신칙하셔서 태평한 시대를 이루실 거라 말하고 있습니다."
    청국 백성들은 공친왕보다 성군의 자질을 갖춘 동치제가 친정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말이었다. 왕은 흡족해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달빛이 교태전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침소 한구석에 놓인 향로에선 사향의 고혹적인 향내가 왕과 중전 주위를 감돌았다. 중전의 작고 미끈한 이마가 달빛을 받고 있었다. 비단 속옷이 중전의 늘씬한 팔과 어깨의 윤곽을 부드럽게 드러내고 있었다.
    "정사와 서장관에게 물으니 황제가 현명한 데다 학문을 부지런히 연마해 신하와 백성들이 크게 기대한다고 하오."
    ‘전하가 지금 황제의 친정(親政)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왕의 품에 안겨 있던 중전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그러시오?"
    왕은 놀라 반쯤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전하!"
    중전의 눈이 금강석처럼 반짝였다.
    "10년간 강학에만 전념해오신 전하야말로 성군의 도를 펼치실 때입니다!"
    "중전!"
    왕은 사랑스러운 중전의 뺨을 어루만졌다.

    (28화는 2021년 4월 21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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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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