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29) 운현궁의 횃불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4.30 23:00

    [그림자 황후]

    1부 (29) 운현궁의 횃불

    1872년 12월 26일 자경전.
    왕은 막 연경을 다녀온 박규수를 긴히 불렀다.
    박규수는 연경이 서양 오랑캐에 짓밟혀 황제가 열하로 피신갔던 1861년에 이어 두 번째 사행이었다. 박규수는 오랑캐의 실상을 눈으로 보았고,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의 손자여서 식견이 남달랐다.
    "서양 오랑캐들은 아직도 성안에 있소?"
    "전처럼 성안에 머물러 살고 있었사옵니다. 연경에서 들으니 청국이 법국(法國·프랑스)에 사신을 보냈다고 하옵니다. 법국에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통호(通好)할 것을 요구해 청국이 흠차대신을 파견하였다고 하옵니다."
    "음…."
    왕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손에서 땀이 났다. "청국 사신은 법국 왕에게 황제의 명을 전하고, 돌아오면서 영국과 미국을 두루 보고 돌아왔다고 하옵니다."
    "그렇소?"
    "최근에는 청국도 서양 대포를 만들었는데 지극히 편리해서…..."


    왕은 박규수가 물러간 뒤에도 한동안 얼얼했다. 영국과 법국의 침략을 받아 호되게 당한 청국이 서양 대포를 만들고 화륜선까지 모방해서 만들고 있다는 말에 가슴이 답답했다.
    박규수가 배석한 신료들을 의식해 강하게 말하진 못했지만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알았다. 박규수는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에 타 대동강에 침몰했을 때 그 배를 인양해 자세히 살핀 평안도 관찰사였다.
    제너럴셔먼호는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과 덴마크인 선장 페이지, 통역인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가 탄 무장상선이었다. 박규수가 식량을 제공하며 물러갈 것을 요구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평양까지 들어와 약탈과 살상을 저질렀다. 분노한 관민들이 불을 질러 침몰시킨 사건이었다.
    박규수는 당시 서양의 강력한 무기를 보고 공포감을 느꼈고 이번에 청국 상황을 보면서 왕에게 호소했던 것이다.
    "김 내관 있느냐! 운현궁으로 가자!"
    왕은 경근문을 통해 운현궁으로 향했다. 경근문은 왕이 운현궁을 가볍게 드나들 수 있게 한 전용문이었다. 왕은 이번에야말로 대원군에게 청국과 오랑캐들의 상황을 알리겠다고 결심했다.


    "전하 미리 전갈도 주시지 않고 어쩐 일이시옵니까?"
    운현궁에 차출된 대비전 상궁이 나긋한 허리를 숙였다.
    왕은 경내에 흐르는 가야금 소리에 멈칫했다. 궁중 나인과 겸종들이 술과 안주를 나르고 있었다. 행랑채에는 대원군을 만나기 위해 몰려든 사내들의 신이 수북했다.
    "대원위 대감은 계시느냐?"
    "예 영상이 와서 함께 하고 있사옵니다."
    왕의 얼굴이 잠시 경련을 일으켰다.
    ‘어디 영상뿐이랴. 매사를 나보다 대원군에게 먼저 보고하고 있는 자들 아닌가.’


    "해도 넘어갔는데 어쩐 일이십니까 주상. 오랜만에 오셨소이다."
    가무잡잡한 얼굴이 불콰해진 대원군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타났다.
    옷에선 음식 기름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왕은 대원군의 비수 같은 눈빛을 보자 가슴이 벌렁거렸다.
    "예…급히 의논드릴 바가 있어 왔습니다."
    왕은 대원군을 마주 보았다.
    곤룡포 아래 팔과 다리를 떨고 있었다.
    대원군은 장순규를 불러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하게 엄명한 뒤 안쪽 밀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
    대원군의 카랑한 목소리가 냉랭한 방안에 쩌렁 울렸다.
    "연행사에게 들으니 청국도 오랑캐와 통호하고 스스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도…."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게야!"
    대원군의 눈에 불꽃이 일고 수염이 꼿꼿이 서기 시작했다.
    "이 나라를 이끌고 가는 사람이 너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누구 덕에 왕좌에 앉았는데 이젠 좀 컸다고 아비를 기어오르려 하느냐! 이 나라가 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궁으로 돌아온 왕은 경회루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관과 상궁, 나인들을 물러서게 하고 혼자 누각에 올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찬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고 폐부로 들어왔다.
    "전하 날이 찬데 곳불이라도 드시면 어쩌시려고 여기 계시옵니까?"
    왕비가 솜을 두둑하게 넣은 누비 두루마기를 가져와 왕에게 입혔다.
    "운현궁에 다녀오셨지요?"
    "어찌 아셨소."
    왕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하늘 아래 자신과 왕비 두 사람만 서 있다는 고독감이 밀려왔다.
    "박규수에게 청국 사정에 대해 자세히 물으셨고요. 대원군에게 오랑캐와 통호해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싶으셨사옵니까?"
    "그건 또 어찌 알았소. 귀신같이!"
    "전하가 그토록 흠모하시는 정조대왕께서도 어려움이 많으셨지만 이겨내셨습니다. 오랑캐만이 문제가 아니지요. 끝없는 노역에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원납전 독촉에 홧병이 난다고 합니다. 어려운 백성들에게 성문세를 받고 있으니 될 법한 일이옵니까? 백성을 어루만져주시고 나라를 강건하게 하는 일에 전념하셔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대원위 대감이…."
    "전하! 이것은 부자간의 다툼이 아닙니다. 종묘사직의 명운이 달린 일입니다."
    왕비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자 부르르 떨었다.


    "오라버님 전하께서 이제 친정에 나서실 때가 됐습니다."
    얼굴이 상기된 민승호는 소리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 중전마마."
    "전하께서 오라버님을 병조판서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외로웠던 조영하 조성하와 마음이 상했을 김병학 김병국 형제도 보듬어주세요."
    대왕대비의 풍양 조씨 세력과 안동 김씨 세력을 다지라는 말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마마!"
    "5년 전 상소로 대원군을 질타했던 최익현 기억하시지요? 최익현을 승지로 제수하면, 시키지 않아도 할 말을 쏟아낼 것입니다."


    1873년 10월.
    조정은 대원군을 비난한 최익현의 상소로 다시 발칵 뒤집혔다.
    "그칠 새 없이 받아내는 세금 때문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있다"며 백성을 동원하는 공사를 당장 중단하고 원납전과 성문세를 폐지하라는 상소였다.
    최익현은 대신과 육조판서, 대간들이 대원군에게 아첨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왕은 최익현의 상소에 대해 "매우 가상한 말이다"며 호조 판서로 제수하겠다고 명했다.
    왕의 반응에 놀란 좌의정과 우의정이 사직하겠다면서도 최익현을 패악한 인물로 공격했고,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도 자신들을 처벌해달라면서 규탄하는 연명 상소를 올렸다. 6조 판서들도 연명 상소를 올렸고, 성균관 유생 300여 명은 권당을 하며 최익현을 맹비난했다.
    자신들을 모조리 처벌할 수 없으니 최익현에게 벌을 내릴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경악했다.
    왕이 "경들의 상소는 매우 개탄스럽다!"며 이들을 모조리 파직시킨 것이다.


    왕이 초강수로 나오자 대원군 측은 대경실색했다.
    대원군은 영돈녕부사 홍순목과 좌의정 강로, 우의정 한계원을 급히 운현궁으로 불렀다.
    밤이 깊었고 운현궁에는 횃불이 여기저기서 타오르고 있었다. 군영에서 활약하는 포수들도 총을 감추고 은밀히 모여들고 있었다.
    횃불을 들고 안으로 인도하는 장사(壯士)들의 얼굴이 살기를 띤 듯 활활거렸다.

    (30화는 2021년 5월 7일 23:00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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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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