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1부 (30) 아버지와 아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5.07 23:00

    [그림자 황후]

    1부 (30) 아버지와 아들

    1873년 11월.
    "이럇!"
    매사냥에 나선 대원군은 말을 힘껏 달렸다.
    호랑이 가죽을 깐 안장과 갖옷 때문인지 땀이 흘렀다.
    대원군의 수족인 ‘천하장안’과 1000근짜리 쇠솥을 드는 장사들, 포수와 나졸들, 운현궁 가노들이 우르르 뒤를 따랐다. 가마꾼과 대원군 행차를 소리로 알리는 급창, 개울이 나타나면 업어 건너는 월천군(越川軍), 어두워지면 횃불을 들 거화군까지 따르는 대단한 행차였다.
    컹컹컹-
    사냥개 10여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뛰었다.
    ‘그 아이가 그럴 리가 없어. 필시 어느 놈들이 흉모를 꾸미는 게 틀림없어. 놈들을 찾아서 도륙을 내고야 말겠다!’
    대원군은 최익현을 감싸는 왕에게 격분하고 있었다.
    가벼운 눈발이 대원군의 뺨을 때렸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쥐어준 아비를 거역해?’
    "잡았다! 잡았어!"
    매가 커다란 날개를 펴고 순식간에 날아올라 발톱으로 꿩을 움켜잡았다. 순한 눈빛의 꿩에게 무시무시한 매의 발톱이 파고 들었다.
    ‘누구라도 거역하게 놔둘 순 없다. 누구라도!’


    "홍순목 대감과 좌상 우상이 와 있습니다."
    운현궁으로 돌아온 대원군은 갖옷을 벗지 않고 내실로 들어갔다.
    비릿한 냉기가 채 가시지 않았다.
    대원군은 가장 은전을 많이 베푼 한 명을 불렀다.
    "최가 놈의 국청은 어찌 되었나."
    대원군의 검은 눈이 번쩍 빛났다.
    "조정이 다 나서서 상소를 올리고…."
    그는 바닥에 찧을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서캐 같은 놈 하나를 잡지 못하고 대신이랄 수 있느냐!"
    "악! 대- 대감!"
    대원군은 벽에 걸어둔 각궁을 들어 화살을 메기고 있었다. 팽팽한 화살은 대신의 목을 뚫을 듯 헐떡이고 있었다.
    "하 합하! 고정하십시오!"
    새파랗게 질린 대신이 자지러졌다.
    "당장 튀어가 최가와 그 도당들을 도려내라!"


    영돈녕부사 홍순목, 좌의정 강로, 우의정 한계원은 급히 왕을 뵙겠다는 청대를 올렸다.
    침소에 들었던 왕이 자경전으로 나왔다.
    "무슨 급한 일이길래 깊은 밤에 청대를 하였소?"
    "최익현의 죄악이 엄중한데 국청을 윤허하지 않으시니 한시도 놔둘 수 없어 왔사옵니다!"
    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최익현의 상소에서 어느 구절이 그리 흉패하오?"
    "이러한 성세(聖世)에 흉역한 속셈을 가지고 글을 올렸습니다. 윤허를 내리실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것이옵니다!"
    "시골의 무지한 사람으로 책할 것이 없소. 물러들 가시오."
    "4000년 동안 어찌 이 같은 대변괴가 있겠사옵니까. 서캐 같은 천류가 화를 끼치고 있습니다."
    "대신들의 뜻이 정 그러니 최익현을 유배 보내겠소."
    "유배로 그칠 일이 아닙니다! 깊은 밤 청대한 것이 어찌 도배에 그칠 처분을 바라고 한 것이겠습니까?"
    왕이 주먹으로 서안을 내리쳤다.
    "대신들이 정 그렇다면 국청을 열겠소! 이제부터는 과인이 모든 정무를 직접 다스리겠소!"
    스물두 살 왕의 친정(親政) 선언이었다.
    숨 막히게 왕을 압박하던 세 사람은 멍하니 할 말을 잃었다.


    최익현은 차꼬를 차고 칼을 쓴 채 추국장에 끌려왔다.
    그러나 왕은 하루 만에 추국을 파하고 제주목에 위리안치하라는 명을 내렸다.
    왕은 "대왕대비께서 최익현을 가벼이 처벌하라고 특별히 자교를 내리셨다. 이를 어기면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다"며 추국을 철파했다.
    조정은 다시 격렬하게 요동쳤다.
    대신들과 신하들이 사퇴하거나 집무를 거부하고 의금부마저 왕명을 거부했다.
    왕은 영의정에 이유원을 우의정에 박규수를 제수하며 중신들을 바꿔나갔다.


    운현궁에 대원군의 측근들이 모여들었다.
    대원군은 최익현이 유배갈 때 "최충신"이라며 연호하는 백성들에게 충격을 받았다. 자신에게 환호하던 자들 아닌가.
    "합하! 명령만 내려주십쇼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죄다 쓸어버리겠습니다요!"
    수뢰포(水雷砲)까지 만들었기에 화약 다루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 이씨와 민승호가 중전을 찾았다.
    중전은 해산을 석 달 앞두고 극도로 몸조심하고 있었다.
    탕약을 달여온 이씨가 왕비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마마께 무슨 일이 생기면 저는 살지 못합니다."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며 왕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있는 왕비는 바짝 말랐다.


    콰 쾅!
    "불이야! 불이야!"
    12월 10일 자경전 한쪽 누각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대왕대비의 처소인 자경전은 근래 왕이 정무를 보던 곳이었다.
    대왕대비는 물론 교태전도 멀지 않아 중전도 대피하며 크게 놀랐다.
    불이 전각들을 태워 창덕궁으로 이어해야할 상황이었다.
    이유원은 국청을 열어야 한다고 흥분했지만 왕은 더 이상 확대하지 않았다.
    대신 무위소(武衛所)를 세우고 대왕대비의 조카인 조영하를 금위대장, 어영대장에 민규호로 갈아치웠다.


    1874년 2월 8일.
    왕과 왕비가 그토록 고대하던 원자가 태어났다.
    8년만에 원자를 안아 든 왕과 왕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당당한 아비가 되고 조선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결코 물러설 수 없다!’
    왕의 대응은 더욱 강경해졌다.
    대원군은 덕산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왕에 대한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환궁을 청하는 전갈이 없었다.
    대원군을 위해 나서는 자들만 처벌을 받거나 쫓겨났다.
    결국 대원군은 한양으로 돌아와 칩거에 들어갔다.
    왕이 사투 끝에 얻은 승리였다.


    민승호가 어머니인 한창부부인, 어린 아들과 식사를 하는데 누군가 찾아왔다.
    심부름꾼은 보석함 같은 것을 전하며 귀한 물건이니 사람들 없는 데서 열어보라는 말을 전하고 사라졌다.
    쾅!
    민승호가 함에 달린 자물쇠를 여는 순간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고, 함께 있던 세 사람은 숨졌다.
    "어머니!"
    비보를 들은 왕비의 처절한 오열이 공기를 찢었다.

    1부 끝.

    다음 주부터 <그림자 황후> 2부가 시작됩니다.

    (2부 1화는 2021년 5월 14일 23:00 공개합니다)

    그림자 황후 1부 (29) 운현궁의 횃불
    그림자 황후 1부 (28) 배 띄워라
    그림자 황후 1부 (27) 섭정을 받는 청 황제
    그림자 황후 1부 (26) 조선을 떨게 한 다섯글자
    그림자 황후 1부 (25) 왕이 되고 싶었던 남자
    그림자 황후 1부 (24) 순원왕후의 유산
    그림자 황후 1부 (23) 화폭에 옥린을 담다
    그림자 황후 1부 (22) 하얀 치파오
    그림자 황후 1부 (21) 연경의 미녀를 보러 가다
    그림자 황후 1부 (20) 도련님과 홍매
    그림자 황후 1부 (19) 피 묻은 다홍저고리
    그림자 황후 1부 (18) 10년만의 만남
    그림자 황후 1부 (17) 두 마리 용이 하늘로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16) 왕자 탄생의 의미
    그림자 황후 1부 (15) 수상한 그림책
    그림자 황후 1부 (14) 첫날 밤
    그림자 황후 1부 (13) 조선을 뒤흔든 혼례
    그림자 황후 1부 (12) 왕비 간택
    그림자 황후 1부 (11) 너울이 벗겨지다
    그림자 황후 1부 (10) 승은(承恩)을 입다
    그림자 황후 1부 (9) 궁녀 이씨
    그림자 황후 1부 (8) 열두 살 명복 왕위에 오르다
    그림자 황후 1부 (7) 동백꽃
    그림자 황후 1부 (6) 속치마를 벗고 먹을 갈다
    그림자 황후 1부 (5) 월창(月窓)
    그림자 황후 1부 (4) 소녀의 슬픔
    그림자 황후 1부 (3) 한성(漢城)
    그림자 황후 1부 (2) 왕후족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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