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미 역사소설] 그림자 황후 2부 (4) 유대치를 방문하고 宮女를 만나다

  • 손정미 작가
    입력 2021.06.04 23:00

    [그림자 황후]

    2부 (4) 유대치를 방문하고 宮女를 만나다


    칠순을 바라보는 박규수는 눈빛이 쏘는듯했고 움직임에 힘이 있었다.
    김옥균과 서광범 박영교 유길준은 경외심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박규수는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모두가 마다하던 연경행을 자청할 만큼 나라 밖 정세를 파악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들에게 박규수는 척사파의 칼날을 피해 살아남은 영웅이자 숨 쉴 공간을 열어준 은인이었다.
    박규수는 마흔을 넘긴 김윤식부터 앳된 얼굴의 박영효까지 찬찬히 둘러보았다. 태웅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이 열리고 사내종이 뭔가를 조심스레 서안에 올려놓았다.
    "문을 잘 닫고 나가고, 사랑채 주변엔 사람을 들이지 말 거라."
    모두 숨을 죽이자 방안에는 비단옷 사각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박규수가 붉은색 보자기를 벗겼다.
    "와!"
    탄성이 흘러나왔다.
    수박만한 크기의 둥근 구체였다.
    "그게 무엇입니까?"
    "오늘 처음 보는 사람도 있을 거 같아 일부러 내왔네. 지세의(地勢儀)란 걸세."
    "지세의요?"
    "여길 보게나. 여기가 조선 땅이고 이쪽이 청국이고 이쪽으로 죽 가면 법국(프랑스)과 구라파라네. 여길 보면 청국의 세력이 미치는 곳을 이만큼 그렸고, 나라별로 시각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네."
    제자들이 목을 빼 들고 쳐다보았다.
    박규수가 손으로 지세의를 빙그르 돌렸다.
    "이것 보게 지금은 미국이 가운데로 와 있지? 청국이 항상 중앙에 있는 게 아니란 걸 알겠나?"
    "하! 대단하십니다!"
    서광범이 지세의를 세밀하게 보느라 미간을 좁혔다가 환하게 웃었다.
    ‘더 이상 청국은 중화(中華)가 아니다!’


    "왜놈들이 서계 문제를 가지고 자꾸 생트집을 잡고, 아라사(러시아)도 틈만 노리고 있으니 속이 탑니다."
    박영교가 분통을 터뜨렸다.
    "저들이 요구하면…음…문을 열어야 하네. 일단 시간을 번 뒤 그동안 우리도 힘을 키워야지. 일본은 태서(泰西·서양)와 통교를 하면서 그들과 같아졌어. 일본과 괜히 맞설 경우 적국 하나를 보태는 꼴이야."
    "왜국도 왜국이지만 다른 나라도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진중하게 앉아있던 김윤식이 한마디 했다.
    "여러 나라 하고 우호를 맺으면 한나라가 침범해오는 예봉은 피할 수 있을게요. 위원도, 그 <해국도지> 쓴 위원도 양이(洋夷)들 중에 미국이 풍요롭고 예의를 아는 나라라고 했으니 미국을 눈여겨 봐야겠지."
    이날 처음 나온 박영효는 파란 눈의 악마로 알던 양이와 통교해야 한다는 소리에 몸이 달달 떨렸다.
    "하루가 급한데 당장 어찌해야 할지 답답합니다."
    김옥균이 지세의를 만져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에 모두 시선을 풀고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탐관오리의 부패는 쉬 줄지 않고 해안과 변경에는 오랑캐들이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어서 빨리 나라를 일으켜 강국으로 거듭 나야하는데 뒷걸음질만 치니 가슴이 무거웠다.
    ‘나라도 나서야지!’
    이들의 가슴 속에는 저마다 빨간 꽃이 자라고 있었다.


    대원군이 일단 물러났지만 그 세력이 발톱을 세우고 복귀를 노리고 있었고, 척사의 기운은 여전했다.
    다만 개화에 긍정적인 민씨 척족이 부상하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민태호와 민규호가 박규수와 뜻이 맞았던 유신환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오늘 오고 간 이야기는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박영교가 입단속을 하자 순간 얼음처럼 차가워지며 긴장이 흘렀다.
    무고를 당하면 자칫 역당으로 몰릴 수 있었다.


    박규수의 사랑채에서 나온 김옥균이 태웅을 불러 세웠다.
    "<연암집>은 읽었소? 앞으로 여기에 오려면 <연암집>을 읽어두는 게 좋을 게요."
    "아직입니다."
    태웅이 부리부리한 눈을 굴리며 다소 심드렁하게 답했다. 비도 촉촉이 내리기 시작해서 어디 들어가 술이나 하고 싶었는데 김옥균이 놔주질 않았다.
    "그럼 말 나온 김에 대치 선생 댁으로 가보세. 거기는 있을 듯하니."
    김옥균은 박규수의 집에서 종이에 기름을 먹인 우의(雨衣)를 빌렸다.
    "대치 선생은 한의(漢醫)시라네. 경서는 물론이고 역사에 아주 박학다식하시지."
    김옥균은 특히 유대치로부터 불교에 대해 배워 호감이 컸다.
    관철동 유대치의 집에 들어서자 약재 냄새가 확 풍겨왔다.
    "비도 오는데 어쩐 일이시요?"
    유대치(劉大致)로 불리는 유홍기였다.
    몸이 장대하고 머리가 희끗희끗하며 얼굴이 불그스름한 40대 사내였다.
    김옥균은 유대치를 보자 아까와 달리 은밀하면서도 친근한 활기를 띠었다.
    "여기는 민태웅이라고 합니다. 재동 사랑방에 오게 됐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대치는 태웅을 날카롭게 훑어보았다.
    ‘예사로운 상은 아니야. 그런데 고우(김옥균의 호)하고는 좋지 않는데….’


    유대치의 서가에는 오경석이 연경에서 가져온 <박물신편(博物新編)> 등 한역한 외서들이 많았다. 한쪽에는 만국지도까지 붙어 있었다.
    유대치 집안도 역관이었지만 본인은 의원이 되었다. 오경석은 아들 세창을 역과 시험에 붙이기 위해 집에 가숙을 마련했고 가르칠 스승으로 한학에 밝은 유대치를 택했다. 유대치와 오경석은 중인으로서 서로 뜻이 맞아 깊이 마음을 나누는 친구였다. 오경석은 1872년 사행길에 박규수와 동행하면서 가까워졌고, 이후 유대치까지 합세했다. 김옥균은 박규수를 통해 두 사람을 알았다.
    책을 뽑아 잠시 휘적거린 김옥균이 유대치에게 몸을 돌렸다.
    "참, 댁에 <연암집>이 있으면 빌려주십사하고 왔습니다."
    "사세가 이렇게 급박한데 <연암집>을 읽을 때는 아닌 것 같소."
    유대치의 굵고 묵직한 목소리가 방안 가득 울렸다.
    "대신 다음에 알아두면 도움이 될 사람을 한 명 소개해드리지요."


    김옥균은 유대치 집을 나와 내친김에 가까운 오경석의 집으로 갔다.
    태웅은 핑계를 대고 먼저 달아났다.
    오경석은 7대가 대대로 역관을 지낸 집안으로, 그 부친은 재산으로 2000석을 물려주었다.
    하인의 안내로 안으로 들어서자 잘 차려입은 여인이 뒤늦게 고개를 돌리며 길을 비켰다.
    여인은 내리는 비를 처연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김옥균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비 맞은 제비꽃처럼 싱싱하면서도 내밀한 매력이 풍겨 나왔다.
    "누구인가?"
    김옥균은 따라오던 하인에게 슬쩍 물었다.
    "예예 대궐 궁녀아입니꺼. 언문을 억수로 잘 쓴다고 소문났다카대예. 나으리가 청국서 가져온 책을 가지러 왔다나."
    "아! 중궁전의 강 상궁이구나!"
    김옥균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서둘러 여인을 찾아 나갔다.


    (2부 5화는 2021년 6월 11일 23:00 공개합니다)

    그림자 황후 2부 (3) 김옥균과 북촌 도련님
    그림자 황후 2부 (2) 사무라이의 메이지유신
    그림자 황후 2부 (1) 국선(國仙)의 후예

    그림자 황후 1부 (30) 아버지와 아들
    그림자 황후 1부 (29) 운현궁의 횃불
    그림자 황후 1부 (28) 배 띄워라
    그림자 황후 1부 (27) 섭정을 받는 청 황제
    그림자 황후 1부 (26) 조선을 떨게 한 다섯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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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24) 순원왕후의 유산
    그림자 황후 1부 (23) 화폭에 옥린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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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20) 도련님과 홍매
    그림자 황후 1부 (19) 피 묻은 다홍저고리
    그림자 황후 1부 (18) 10년만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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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16) 왕자 탄생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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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13) 조선을 뒤흔든 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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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6) 속치마를 벗고 먹을 갈다
    그림자 황후 1부 (5) 월창(月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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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자 황후 1부 (3) 한성(漢城)
    그림자 황후 1부 (2) 왕후족
    그림자 황후 1부 (1) 세상을 갖고 싶은 소녀

    손정미 작가 소개

    ※손정미 작가는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조선일보 사회부·정치부·문화부를 현장 취재했다. 2012년 역사 소설을 쓰기 위해 조선일보사를 그만뒀다.

    경주를 무대로 삼국통일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을 다룬 ’왕경(王京)’을 시작으로 고구려 소설 ‘광개토태왕(1·2)’, 고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공 서란’을 썼다. 주요 문화재를 역사적 배경에서 심층적으로 풀어 쓴 ‘조선 막사발에서 신라 금관까지’가 2020년 가을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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