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행해지는 사용자 감시와 교묘한 데이터 수집이 없었다면 인터넷 기업들은 이렇게 빨리 세를 불리지 못했을 것이다."

『친절한 독재자, 디지털 빅브라더가 온다』의 저자 한중섭 작가는 플랫폼 기업이 성장한 결정적 이유가 ‘데이터 수집’에 있다고 진단했다. 한 작가는 우리가 편리함을 좇는 사이 전면적인 감시사회가 도래했다고 경고한다. 개인의 검색 정보로 관심 분야와 선호하는 상품 등을 파악해 맞춤형 광고를 하는 등 플랫폼 기업들은 개인의 노출된 정보로 광고 등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이터가 감시권력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98년 검색엔진의 작동원리를 다루는 논문이 등장하면서다. 구글은 검색엔진을 광고에 접목하면서 세계적인 플랫폼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자본금 5억원으로 시작한 네이버가 22년만에 시총 70조원의 국내 최대 IT기업으로 자리잡은 과정에도 검색엔진이 절대적인 동력으로 작용했다. 빅데크 독점을 다룬 『돈 비 이블(Don’t be evil)』의 저자 라나 포루하(Rana Foroohar)는 이를 ‘공짜정보의 힘’이라고 표현했다.

검색 엔진의 가공할 위력...스스로 진화하는 ‘자기강화’

라나 포루하는 검색 엔진의 힘이 ‘자기 강화’에 있다고 설명했다. 매력적인 콘텐츠가 많은 플랫폼에 사용자가 모인다. 이들의 검색 기록은 또 다른 데이터를 낳는다. 데이터는 기존 사용자들의 네트워크를 끌어들인다. 플랫폼 검색으로 무한한 공짜 정보가 열리면서 극도의 편리성이 제공된다. 검색 알고리즘은 스스로 진화하며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든다.

검색엔진이 광고와 결합하면 공짜정보는 가공할 위력을 얻는다. 데이터가 늘면 사용자가 늘고 광고주가 증가한다. 광고로 유입되는 트래픽이 증가하면 또 다시 데이터가 늘어나는 선순환 구조가 완성된다.

라나 포루하는 이를 두고 "특정 제품이나 기능을 사용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해당 제품이나 기능의 성능이 점점 개선되는 네트워크 효과"라고 설명했다.

구글은 검색엔진의 힘을 증명했다. 1999년 8월 하루 검색 300만건에서 2000년 여름 1800만건으로 늘었다. 구글의 검색 기능을 이용하는 야후까지 더하면 6000만건에 달했다. 구글은 데이터를 먹고 자라는 공룡 기업이 됐다.

네이버, 검색 기술 고도화와 지식iN서비스로 검색시장 평정

네이버의 검색엔진은 1997년 삼성SDS의 한 벤처팀에서 태동했다. 이해진 창업자는 1998년 DB검색엔진 네이버를 개발, 자신이 이끌던 웹글라이더팀과 네이버컴을 설립했다. 웹글라이더팀이 마련한 3억5000만원과 삼성SDS의 현물출자 1억5000만원이 네이버의 자본금이다.

1999년 오픈한 네이버가 포털 서비스를 호령하던 야후를 출시 5년 만에 제칠 수 있었던 요인은 검색 기술 고도화, 핵심 인재 영입, 네이버 지식iN 서비스 등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네이버는 검색 정확도와 만족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네이버는 검색엔진에 검색 로봇을 붙여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방대한 양의 웹문서와 웹사이트를 자동으로 수집해 키워드 단위로 색인하는 크롤링 방식을 사용했다.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당시 야후코리아, 라이코스, 네띠앙 등 포털들은 디렉토리 방식으로 전문검색요원을 고용해 수작업으로 개별 웹사이트를 찾아낸 뒤 주제별로 모았다. 네이버와 엠파스는 크롤링 방식에 더해 직접 정보를 편집하거나 분류해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네이버는 이런 방식으로 야후코리아보다 더 방대한 결과 값을 도출할 수 있었다.

야후코리아 등의 외국산 검색엔진은 영어를 바탕으로 개발돼 있어 한국어 검색에는 네이버의 검색엔진이 더 앞섰다는 평가도 있다. 검색의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분석해 결과를 찾아내는 방식이었다. 당시 경쟁 포털사는 검색 단어만으로 검색 결과를 제공해 정확도가 떨어졌다. 아울러 수집과 스팸 시스템을 개선하고 좋은 웹문서를 검색할 수 있도록 검색 랭킹을 손봤다.

특히 경쟁사인 엠파스의 이준호 NHN 회장을 영입한 게 신의 한 수로 회자되고 있다. 이준호 회장은 이해진 의장의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3년 선배로 우리나라 '정보검색 기술의 아버지'로 불린다. 이 회장은 숭실대 컴퓨터학부 교수로 재직했으며, 엠파스 자연어 검색 서비스의 공동개발자였다. 이후 엠파스와 갈등으로 결별한 후 이 의장의 제안과 투자 지원으로 서치솔루션을 설립하고 검색 솔루션을 네이버와 공동 개발했다.

네이버는 2000년 7월 서치솔루션과의 합병 이후 넥서치라는 이름의 검색엔진을 개발해 검색환경을 개선했다. 기존의 웹문서 단위 검색에서 벗어나 웹문서, 사이트, 사전, 뉴스 등 정보의 성격에 따라 섹션을 분리해 보다 중요한 정보로 예상되는 결과를 제시하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통합검색'으로 불리는 검색방식이 도입된 것이다.

또 2002년 10월 도입된 지식iN 서비스는 네이버의 시장점유율 확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지식iN은 이용자 간에 질문과 답변을 하면서 정보를 교류하는 서비스다. 한겨레신문의 자회사인 인터넷한겨레가 2000년 10월 오픈한 디비딕(dibidic.com)이 그 원조다. 네이버는 디비딕의 장단점을 검토해 보다 대중적인 지식 제공으로 변형시켜 출시했고, 지식iN은 출시 6개월 만에 100만건의 질의응답이 작성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식iN 서비스를 시작한 1년여만에 네이버의 검색 서비스 순방문자 규모는 전체 포털 사이트 중 3위에서 1위로 올라서게 됐다. 2003년 11월에는 무려 1400만명의 이용자가 네이버 지식iN을 이용했다. 이는 전체 네이버 검색 서비스 방문자의 75%를 차지하는 수치였다. 2005년 이후 네이버의 검색 점유율은 70% 수준으로 네이버는 검색 서비스 분야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됐다.

서비스 다각화로 검색광고 실적 고공행진…2014년 총매출 비중 70% 돌파

차별화된 검색엔진이 매출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클릭수와 관계없이 일정 기간 동안 광고주의 웹사이트를 노출시켜주는 방식을 도입하면서다. 아울러 인기 키워드에 대한 경매 방식을 도입하면서 네이버는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네이버는 검색 서비스 제공을 넘어 정보를 취득할 수 있는 도구를 활용하는 공간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네이버 검색 일상화 전략이다. 이는 유의미한 결과를 낳았는데 2002년 코스닥 상장 등록예비심사 청구서 제출 당시 네이버의 하루 순방문자는 660만명, 페이지뷰는 1억7000만건에 달했다.

네이버 19개년 감사보고서 참고
네이버 19개년 감사보고서 참고
2002년 네이버의 검색광고 매출은 180억원으로 총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4.2% 정도였다. 2006년 검색광고 매출은 2987억원으로 4년 만에 17배 가량 증가했다. 이때 처음으로 매출 비중 절반을 넘어섰다.

이후 검색광고 매출은 꾸준히 점증하다 2012년 60%을 넘어섰다. 그해 야후는 한국에서 철수했다. 2014년에는 검색광고 매출이 사상 최초로 2조원을 돌파했다. 당시 총 매출 대비 검색 광고 매출 점유율은 73.2%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당시 네이버는 국내 검색 점유율도 80%에 육박하며 국내 최대 IT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조아라 기자 arch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