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스퀘어, SK텔레콤, SK하이닉스 등 SK계열사는 최근 ‘SK ICT 연합’을 결성했다. SK ICT 연합은 첫 결과물인 AI 반도체 ‘SAPEON(사피온)’의 글로벌 시장 판로 확보에 나섰다.

사피온은 국산 AI 반도체로 알려졌지만, 본사는 미국에 있다.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은 대만의 TSMC가 맡는다. 국책과제로 수행한 의미 있는 사업임에도 무늬만 국산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사업을 주도한 SK텔레콤이 이를 고집한 이유에 관심이 쏠린다.

SK그룹 ICT 3사는 6일(현지시각) CES 2022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공동 투자를 통해 미국법인 ‘사피온 Inc.’를 설립해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을 공략한다고 밝혔다. 본사를 미국에 둔 것은 미국에 거점을 둔 글로벌 빅테크 기업을 대상으로 AI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는 전초기지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한국에 있는 사피온 코리아(SAPEON Korea)는 사피온 Inc.의 자회사로, 한국과 아시아 지역 내 사업을 담당한다.

SK텔레콤이 SK 관계사와 함께 마련한 CES 2022 공동 전시 부스에서 모델들이 AI 반도체 ‘사피온(SAPEON)’을 소개하는 모습 / SK텔레콤
SK텔레콤이 SK 관계사와 함께 마련한 CES 2022 공동 전시 부스에서 모델들이 AI 반도체 ‘사피온(SAPEON)’을 소개하는 모습 / SK텔레콤
IT조선의 취재를 종합하면, SK텔레콤은 AI 반도체 시장 개척을 위해 2020년 말 사피온을 출시한 시점부터 미국에 법인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국내에 본사를 두길 원하는 우리 정부와 줄다리기를 하느라 설립 일정이 지연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국내에 사피온 코리아를 자회사로 두는 형태로 정부와 합의를 이룬 것으로 파악된다.

SK텔레콤이 미국법인 설립이 우선해야 미국 내 풍부한 반도체 개발 인력을 확보하고 외부 투자를 유치하는데 유리하는 판단을 내렸다. 실제 ‘하바나랩스’, ‘퓨리오사AI’ 등 글로벌 AI 반도체 스타트업 중 다수가 미국에서 법인 설립으로 회사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SK텔레콤이 국내에 AI 반도체 법인을 설립하면 규제 때문에 자회사인 SK하이닉스의 출자가 불가능해진다"며 "SK하이닉스와 합작을 위해서라도 미국 본사 설립은 꼭 필요한 전제조건이었다"고 설명했다.

SK텔레콤은 사피온 첫 제품인 ‘X220’에 후속 버전 생산도 TSMC를 통해 진행한다. 반도체 자회사인 SK하이닉스가 위탁 생산을 맡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SK하이닉스가 인수한 파운드리인 ‘키파운드리’는 8인치 기반 공정으로 시스템반도체를 생산하는데, 사피온의 경우 12인치 공정에서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기준으로 현재 사피온 신제품 ‘X330’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춘 곳은 TSMC와 삼성전자 두 곳뿐이다.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은 6일 미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자체 생산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사피온이 성공을 거두려면 가장 최첨단 공정을 사용해 칩을 설계하고 생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6일(현지시각) 박정호 SK스퀘어·SK하이닉스 부회장이 CES 2022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SK ICT 연합’ 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 SK
6일(현지시각) 박정호 SK스퀘어·SK하이닉스 부회장이 CES 2022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SK ICT 연합’ 비전을 발표하고 있다. / SK
SKT가 한국 기업인 삼성전자가 아닌 대만의 TSMC를 협업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박정호 부회장은 CES 2020이 열린 2020년 1월 삼성전자에 적극적인 구애를 통해 ‘AI 동맹’까지 맺었다. 하지만 AI 반도체 생산은 정작 삼성전자의 최대 경쟁사인 TSMC 몫으로 돌아갔다.

박 부회장은 6일 기자간담회장을 빠져나가며 ‘파운드리 협업의 대상으로 삼성전자를 검토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질문을 전달받아 꼭 직접 답변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답은 하지 않았다.

박 부회장은 아니지만 SK 고위 관계를 통해 TSMC를 사피온 생산처로 삼은 이유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기술력이나 비용 측면에서 TSMC가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SK 고위 관계자는 "첫 AI 반도체 제품인 사피온에 사활을 건 만큼, 시장점유율 50%가 넘는 파운드리 1위 TSMC에 생산을 맡긴 것이 기술·비용을 고려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라며 "벤더 선택에 대한 구체적 이유에 대해 CEO인 박 부회장이 직접 언급하기는 곤란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SKT 측에 사실상 거절에 가까운 제시안을 내놨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기존 거래처인 엔비디아·퀄컴·IBM 등과 비교해 양산 초기 물량이 많지 않은 사피온을 위탁생산하는 것은 삼성전자 입장에서 매력적이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이다.

SKT 관계자는 "5G, AI 분야에서 축적한 R&D 역량과 서비스 경험을 기반으로 사피온 기술 개발을 주도해 중장기적으로 데이터센터, 자율주행 전용 모델 라인업을 늘려 나갈 계획이다"고 말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