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기술'이라는 단어를 세 번 언급하며 기술 초격차를 강조했다. 공급망 위기와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등으로 국내외 경제 위기가 심화된 상황에서 기술 격차 확보를 통한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유럽 출장을 마치고 18일 오전 9시 40분쯤 전세기 편을 이용해 귀국했다.

유럽 출장을 마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8일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를 통해 귀국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조선일보DB
유럽 출장을 마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8일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를 통해 귀국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조선일보DB
그는 "이번에 고객들도 만날 수 있었고, 유럽에서 연구하고 있는 연구원들도 만날 수 있었다"며 "또 우리 영업 마케팅 고생하는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출장지와 관련 "헝가리의 배터리 공장도 갔었고 BMW 고객도 만났다"며 "하만 카돈도 갔었고, 자동차 업계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이 부회장은 "제일 중요한 것은 ASML과 반도체연구소에서 차세대, 차차세대 반도체 기술이 어떻게 되는지, 그런 걸 느낄 수 있었다"며 출장 성과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못 느꼈는데 유럽에 가니까 러시아랑 우크라이나 전쟁이 훨씬 더 느껴졌다"며 "시장의 여러 가지 혼동과 변화와 불확실성이 많은데, 저희가 할 일은 좋은 사람 모셔오고, 또 우리 조직이 예측할 수 있는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다음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 같다. 열심히 하겠다"고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부회장은 반도체 장비 확보와 인수·합병(M&A) 관련 성과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는 별다른 언급 없이 현장을 떠났다.

7일 출국한 이 부회장은 11박 12일간 헝가리와 독일. 네덜란드와 벨기에, 프랑스 등을 방문하며 유럽 출장 일정을 소화했다. 이번 출장에서 현지 사업을 점검하고, 반도체 장비 업체 등 전략적 파트너들을 만나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4일(현지시각)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에서 피터 베닝크(Peter Wennink) ASML CEO(왼쪽), 마틴 반 덴 브링크(Martin van den Brink) ASML CTO(오른쪽)와 기념촬영하는 모습 /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14일(현지시각)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에서 피터 베닝크(Peter Wennink) ASML CEO(왼쪽), 마틴 반 덴 브링크(Martin van den Brink) ASML CTO(오른쪽)와 기념촬영하는 모습 / 삼성전자
이 부회장이 돌아오기 하루 전인 18일 삼성전자의 주가는 52주 신저가를 기록하며 6만원 아래로 내려왔다. 20일 오전 장중에는 5만8500원을 찍었다. 경기 둔화와 반도체 업황 불확실성, 미국의 물가 폭등으로 인한 긴축 우려에 내리막길을 지속해서 걷는 분위기다.

재계에서는 '5만전자' 위기에 놓인 삼성전자를 구할 수 있는 모멘텀이 앞서 이 부회장의 행보와 발언에 담겨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부회장이 유럽 출장에서 삼성전자만의 차별적 기술력 확보 필요성을 깨달은 만큼 반도체, 인공지능, 바이오 등 분야에서 더 적극적인 기술 투자 및 도입이 이뤄질 것이란 기대감이다.

ASML 등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ASML 본사에서 차세대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인 ‘하이 NA EUV’를 직접 확인했다. 파운드리와 메모리 초격차를 위해서는 이같은 핵심 장비의 선제적 확보가 필수적이다. 대만 TSMC가 이미 이 장비를 도입하기로 했고, 삼성도 도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ASML CEO는 물론 같은 날 네덜란드 총리까지 만나 협력방안을 논의한 것은 EUV 노광장비 물량 확보에 사실상 삼성의 반도체 기술 초격차 실현이 달렸다는 절실함 때문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이 부회장은 네덜란드에 이어 벨기에 루벤을 방문해 종합반도체 연구소 imec의 루크 반 덴 호브 최고경영자(CEO)를 만났다.

imec는 유럽 최대 규모의 종합반도체 연구소다. 이 부회장은 imec가 진행 중인 인공지능, 바이오·생명과학, 미래 에너지 등 첨단 분야 연구과제를 소개받고 연구개발 현장을 둘러봤다.

3년 만에 개최하는 삼성전자의 상반기 글로벌전략회의에서 이 부회장의 메시지에 관심이 쏠린다. 삼성전자 글로벌 전략회의는 21일 모바일사업부(MX)를 시작으로 22일 영상사업부(VD), 생활가전사업부(DA), 28일 반도체부품(DS) 부문 순으로 진행된다. 이 부회장이 기술 초격차를 역설한 만큼, 단기 실적보다는 장기적인 기술 경쟁력을 논의하는 자리가 될 것으로 관측된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