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 해외출장을 마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다음 경영 행보로 대규모 인수합병(M&A) 카드를 꺼내들었다. 대상 기업은 영국 반도체 설계 업체 ARM이다.

1990년 창업한 ARM은 모바일 기기의 두뇌에 해당하는 AP 설계 분야에서 독보적 업체다. AP 반도체를 설계하고 지적재산권을 판매해 수익을 얻는다. 삼성전자·퀄컴·애플(모바일 AP), 엔비디아(GPU·그래픽 프로세서) 모두 ARM의 설계를 바탕으로 반도체를 제작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ARM을 M&A한 후 실익이 있을지 의구심을 보인다. ARM의 몸값이 100조원에 달하고, 독자 M&A가 아닌 복수 기업이 지분을 나눠 갖는 컨소시엄 형태가 유력하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ARM을 대주주인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을 직접 만나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한다.

이재용(왼쪽) 삼성전자 부회장, 손정의(맨 오른쪽)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2019년 7월 4일 서울 성북구 한국가구박물관에서 열리는 만찬 회동에 참석하기 위해 함께 차량으로 이동한 뒤 내리고 있다. / 조선일보DB
이재용(왼쪽) 삼성전자 부회장, 손정의(맨 오른쪽)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2019년 7월 4일 서울 성북구 한국가구박물관에서 열리는 만찬 회동에 참석하기 위해 함께 차량으로 이동한 뒤 내리고 있다. / 조선일보DB
이재용 부회장은 21일 해외 출장 귀국길에서 ARM 인수와 관련해 "(영국에서) ARM 경영진을 만나지 않았다"면서도 "다음 달 (ARM 대주주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서울로 온다. 아마 그때 무슨 제안을 할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10월 22일 손 회장은 한국을 방문해 삼성전자와 ARM 간 제휴 가능성을 논의할 것이란 보도가 나왔다.

블룸버그통신은 소프트뱅크 대변인의 발언을 인용해 "손 회장은 이번 방문에 대한 기대가 크며, 삼성전자와 ARM 간 전략적 협력에 관해 논의할 예정이다"고 보도했다. 이재용 부회장과 손정의 회장이 10월 삼성전자의 ARM 인수를 놓고 머리를 맞댄다는 것은 기정사실화 된 셈이다.

M&A 방식은 컨소시엄 형태 가능성이 높다. 2월 미국 엔비디아가 영국을 비롯한 각국 규제장벽에 막혀 인수에 최종실패하면서 ARM은 사실상 컨소시엄이 아니면 인수가 불가능한 회사가 됐다.

급등한 몸값도 문제다. ARM의 2021년 매출은 27억달러(3조 8000억원)에 불과한 반면, 소프트뱅크가 추산한 시장가치는 최소 600억달러(85조원)다. 지난해 인수를 시도한 엔비디아가 660억달러(92조원)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인수가격이 100조원쯤으로 오를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관건은 부풀대로 부푼 몸값을 나눠 지불하는 컨소시엄 M&A 방식이 삼성전자에 실익이 있냐 없냐다. 업계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최소 수십조원을 들여 ARM 지분 매입에 나설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컨소시엄을 통한 인수로는 삼성전자가 AP 설계에서 경쟁사 대비 독점적 지위를 가져가지 못할뿐더러, 주주들에겐 현금 부담이나 이익 훼손 등 이슈로 기업가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차라리 자동차 반도체 전문 회사와 장비 회사 여러 곳을 인수하는 것이 실익이 크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아는 이재용 부회장이 손 회장을 만나보겠다는 이유는 명백하다. 어떤 구성이든 M&A가 이뤄질 ARM의 컨소시엄에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 참여하는 것이 삼성전자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SK하이닉스와 인텔, 퀄컴 주도로 M&A가 이뤄질 경우 컨소시엄이 ARM 반도체 설계자산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반면, 삼성전자는 이들을 상대로 한 라이선스 구입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셈이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컨소시엄에 참여한다고 삼성전자가 당장 큰 이득을 얻는다고 볼 순 없지만, 적어도 참여하지 않는 기업보다는 설계 역량에서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며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연계를 통한 시너지 창출을 구체화 한다면 차세대 메모리 개발에서도 추진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ARM 인수 컨소시엄에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뿐 아닌 해외기업도 필수적으로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특정 국가 기업만 인수에 나설 경우 경쟁당국이 독과점 이슈로 딴지를 걸 수 있어서다. 손 회장이 이같은 상황을 반영해 이 부회장에게 얼마나 솔깃한 제안을 내놓을지에 따라 컨소시엄의 구성의 밑그림이 그려질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반도체 설계자산 주도권을 유지하느냐 뺏기느냐를 놓고 수십조원을 투입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손정의 회장과 손을 맞잡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라며 "향후에는 이 부회장과 손 회장의 구상을 유력 컨소시엄 대상인 SK하이닉스와도 공유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