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대응하는 국내 배터리 3사가 원자재 공급망 다변화에 속도를 낸다. ‘탈중국’을 위해 북미와 아프리카, 동남아, 유럽 등으로 활동 반경을 넓힌다.

이들 배터리 기업만 공급망 확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 대한 원자재 의존도가 압도적으로 높인 상황인 만큼, 그룹사 수장까지 총동원되는 형태다. 배터리 전문 기업 혼자 힘으로는 IRA 인센티브 조건을 맞추기 쉽지 않은 탓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과 구광모 LG그룹 회장. / 각 사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과 구광모 LG그룹 회장. / 각 사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최우선 과제는 ‘중국 외 지역’에서 원자재 공급망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8월 미국 의회를 통과하고 발효된 IRA 법안을 보면, 당장 내년부터 배터리를 구성하는 핵심 광물의 40% 이상을 미국이나 FTA 체결국에서 채굴·가공해야 한다. 그래야 전기차용 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비율은 매년 급상승한다. 2024년 50%, 2027년 80%로 비중을 대폭 늘려야 한다. 쉽게 말해 핵심 광물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세계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한다는 이야기다. 요즘 배터리 업계에서 "공급망 다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IRA의 조건을 배터리 기업 차원에서 만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배터리 원자재에 대한 중국 의존도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중국 음극재 의존도는 85.3%, 반제품은 78.2%, 양극재는 72.5%다.

내년 IRA 시행까지 시간이 얼마남지 않은 상황에서 원자재 ‘탈중국’은 이제 배터리 기업을 넘어 그룹 차원의 과제로 넘어갔다. 일찌감치 미국에 생산 시설을 갖추며 깃발을 꽂아둔 기업들은 공급망 다변화만 잘 극복하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한다.

미국은 중국·유럽과 함께 세계 3대 전기차 시장으로 꼽힌다. IRA 시행으로 사실상 중국 배터리 업체들의 진출길이 막힌 만큼 잘만 하면 점유율을 확대하는 데 유리한 시장이다. IRA를 통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셈이다.

한국신용평가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중국 경쟁사의 북미지역 투자가 위축될 수 있고, 한국 기업이 단독 투자하거나 미국 완성차 업체와 합작하는 형태로 미국 내 생산기반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며 "(IRA 시행은) 중장기적으로는 한국 배터리 및 소재 산업이 수혜를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국내 주요 대기업 총수들은 최근 IRA 시행 관련 다양한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직접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0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잠비아 대통령과 만나 배터리 원자재 관련 민관 협력 모델을 이끌어냈다. 잠비아는 아프리카 내 2위 구리 생산국으로, 배터리 핵심 소재인 동박을 제조하는 SK넥실리스와의 사업 협력을 논의했다. 동박은 구리를 첨단기술로 얇게 만든 막으로 배터리를 구성하는 핵심소재 중 하나다.

SK그룹은 6월과 7월 각각 포스코홀딩스, 포드-에코프로비엠과 배터리 소재 공급망 확대를 위해 협력을 약속했다. 포스코그룹은 3월 아르헨티나에 배터리 소재인 리튬 생산 공장을 착공했다. 또 SK온은 포드-에코프로비엠과 함께 원소재 확보 등 현지화 전략을 세우고, 하반기 북미지역에 양극재 공장을 착공한다. SK그룹은 동남아 주요국과의 협력도 강화한다. SK넥실리스는 말레이시아에 6500억원을 투자하며 연간 4만 4000톤 규모의 동박 생산 공장을 건설 중이다.

LG그룹 역시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10월 초 폴란드에서 모라비에츠키 총리를 만나 부산엑스포 지지를 요청을 하는 동시에 배터리 사업부문을 챙길 것으로 알려졌다.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에는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 공장이 있다.

최근 LG에너지솔루션은 캐나다 광물업체 3곳과 업무협약을 맺고, 배터리 핵심 원재료인 황산코발트, 수산화리튬 등을 공급 받기로 했다. 캐나다는 니켈 매장량 5위, 정련 코발트 생산 3위 등 배터리 원자재가 풍부한 광물 수출 국가다. 앞서 6월에는 미국 리튬 생산업체인 컴파스 미네랄과 탄산, 수산화리튬공급에 대한 업무협약을 맺았다.

LG에너지솔루션은 공급망 다변화에도 힘쓴다. 유럽 리튬 생산 업체인 독일 발칸에너지와 5년간 수산화리튬 4만 5000톤 규모의 공급 계약을 체결했고, 호주 라이온타운과 5년간 수산화리튬 원재료인 리튬정광 70만톤을 확보했다. 또 세계 1위 리튬 보유국인 칠레의 대표 리튬 업체 SQM과 9년간 수산화, 탄산리튬 5만5000톤을 공급계약을 맺었다.

삼성SDI는 미국 인디애나주와 헝가리, 말레이시아 등에서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지만, 원자재 공급망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삼성SDI 관계자는 "아직 IRA의 구체적인 시행령이 나오지 않아 액션을 취하기 보다 상황을 검토하며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혜원 기자 sunon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