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장비업계 ‘거물’이 이달 중 한국을 방문한다. 네덜란드의 노광업체 ‘ASML’이다. ASML은 반도체 미세화 공정에서 꼭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곳이다.

그동안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유럽 출장 때마다 ASML 본사를 찾았던만큼 이번에도 이 회장과 피터 베닝크 ASML CEO간의 만남이 성사될지 주목받는다. 초미세공정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ASML과의 협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월 14일(현지시각)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에서 피터 베닝크(Peter Wennink) ASML CEO와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월 14일(현지시각)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에서 피터 베닝크(Peter Wennink) ASML CEO와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 삼성전자
ASML은 16일 경기도 화성에서 반도체 클러스터 기공식을 연다. 이 자리에는 피터 베닝크 ASML CEO를 비롯해 이우경 ASML코리아 대표이사 등 주요 경영진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ASML은 반도체 클러스터 1만 6000㎡ 부지에 재제조 센터와 EUV 및 심자외선(DUV) 트레이닝센터 등을 구축한다. 2025년까지 2400억원을 투입한다.

재계는 이번 베닝크 CEO의 방한을 통해 ASML과 국내 반도체 기업간 협력 강화 가능성에 주목한다.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베닝크 CEO와 만날 가능성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이 회장은 2020년 10월, 올해 6월 유럽 출장 때 ASML 본사를 방문해 반도체 사업을 챙긴 바 있다.

반도체 사업에서 ASML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ASML의 장비 확보가 곧 기업의 경쟁력이 되기 때문이다. EUV 장비는 7나노미터 이하 초미세 반도체 공정 구현에 꼭 필요한 장비다.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 위에 미세하고 복잡한 회로를 그릴 수 있도록 한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초미세공정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EUV 장비의 수요와 중요성은 커진다.

하지만, 기업들이 수천억원을 싸들고 줄을 서도 장비를 공급받기 쉽지 않다. 연간 EUV 장비 생산 대수가 40대쯤에 그치기 때문이다. 장비 한 대당 가격은 2000억원이 넘는다. 현재 EUV 장비를 가장 많이 확보한 업체는 대만의 파운드리 업체 ‘TSMC’다. TSMC는 그동안 ASML이 생산한 EUV 장비의 절반 이상을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이유로 업계에선 ASML의 차세대 EUV 장비 ‘하이 뉴메리컬어피처(High NA)’에 주목한다. 하이 NA EUV 장비는 일반 EUV 장비보다 더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어 차세대 공정인 2나노 실현을 위한 필수 장비로 여겨진다. 가격은 한 대당 5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역시 연간 생산량이 제한돼 반도체 기업간 확보 경쟁이 치열할 전망이다.

이 회장과 ASML 주요 경영진들과의 만남이 성사될 경우 장비 공급 방안에 대해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장비 확보가 곧 생산 능력과 기술 로드맵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모두 하이 NA EUV를 ASML에 발주한 상태다. 두 회사가 공식적으로 이를 밝힌 적은 없지만, ASML은 10월 19일 "모든 EUV 고객사가 하이 NA 제품을 발주한 상태다"라고 말했다.

ASML의 국내 제재조 시설 건립을 통해 반도체 제조 공급망에 대한 협력도 강화될 전망이다. ASML의 재제조 시설이 들어서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기존처럼 해외에 제품을 이송해 수리를 맡겨야 하는 수고가 사라진다. 국내에서 부품을 조달해 조기 보수가 가능해지면, 반도체 생산 효율성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ASML이 국내에 재제조 시설 등을 세우면 국내 반도체 업체들은 장비 공급이나 서비스를 공급받기 수월해진다"며 "이는 반도체 제조 공급망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 "ASML 입장에서도 주요 고객(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접근성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게 시너지 효과 차원에서도 좋을 것이다"라며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박혜원 기자 sunon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