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은 반도체 패권 다툼 중이며, 특히 미국은 자국 기술이 들어간 제품의 대중국 수출을 통제한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도 난처한 처지다.

하지만 반도체 제조의 필수인 장비를 만드는 ASML은 미중간 갈등에도 위축되는 기색이 없다. 오히려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할 말 다 한다.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이 고조된 상황에서 보란 듯이 대만을 국가로 지칭하는가 하면, 1조2000억원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규제 수위를 높이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를 향해서는 "중국에 대한 수출 규제 시도는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ASML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대체 불가한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라는 지위 덕에 가능한 일이다.

네덜란드 국적의 ASML은 미세 공정이 필수인 반도체 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회사다. 미국산이 아닌 장비를 충분히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규제 압박에도 굴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중국에 제품을 판매하고 장비를 출하한다.

ASML은 꾸준한 투자를 통해 기술 경쟁력을 강화하며 몸집을 키워왔다. 그 결과, 반도체 산업 생태계 구조상 ‘을’에 속하지만,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 사이에 ‘슈퍼을(乙)’로 통한다. 연간 생산 가능한 장비 대수도 30~40대에 불과하다.

미국 행정부가 ASML을 제재한다고 해도, 인텔 등 미국 파운드리 기업에 장비를 판매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어차피 소량만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 제조 장비를 원하는 기업은 차고 넘친다. 오히려 없어서 못 가져오는 게 안타까운 상황이다.

최근 한국은 미중 패권 경쟁에 따른 사업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 불황은 고충의 깊이를 가중한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다. 삼성전자는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메모리 불황을 버틸 충분한 곳간이 있다. 3분기 기준으로 120조원이 넘는 현금 자산을 보유했다. 이재용 회장의 말처럼 기업의 경쟁력은 첫째도 기술이고 둘째도 기술이다. 지금은 투자를 해야 할 시기다. 삼성전자의 발목을 잡았던 반도체 수율 안정화와 기술 초격차를 통해 앞으로 다가올 메모리 호황기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박혜원 기자 sunon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