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법을 놓고 간호단체와 범의료계가 일주일 간격으로 대규모 단체행동에 돌입한 가운데 야당을 중심으로 ‘의사면허법’까지 패스트트랙에 태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포착되면서 의료직역간 갈등 국면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야당뿐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이 간호법 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탓에 일부 여당 의원들이 간호사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지만, 간호단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의료직역이 간호법을 반대하고 나선 상황이라 국회의 고민이 깊어져 가고 있다.

27일 여의도 국회 의사당 앞에서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는 13개 보건복지의료연대. 주최 측 추산 6만여명이 참석했다. / 의협
27일 여의도 국회 의사당 앞에서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는 13개 보건복지의료연대. 주최 측 추산 6만여명이 참석했다. / 의협
의료계에 따르면 간호단체와 13개 단체로 구성된 보건복지의료연대가 일주일 간격으로 대규모 집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200여일째 국회에서 계류 중인 간호법 제정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고 있다.

간호법은 간호사의 처우 개선, 지역공공의료와 지역사회 통합돌봄을 위한 간호정책, 간호인력 확보에 대한 국가와 지방정부의 책임을 명확히 규정하고, 노인·장애인 등에게 요구되는 간호·돌봄 제공체계를 담은 법안이다.

대한민국 현행법 상 간호법은 의료법, 보건의료인력지원법 하에 놓여있는데, 최근 국회에서 간호법을 단독으로 제정해 간호인력을 전문 의료인력으로 배치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번 간호법은 의료법과 별도로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명확히하고 적정수의 간호사 확보 및 처우 개선 등을 규정하는 게 골자로, 법 제정을 주장하는 간호계와 이에 반대하는 의료계간에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간호법 패스트트랙 가능성 커져…간호사 지지 국회 의원도 늘어

간호단체가 21일 주최측 추산 5만명이 참석한 ‘간호법 제정 총궐기대회’ 개최를 시작으로, 27일에는 대한의사협회가 주축이 된 13개 보건복지의료연대 6만명이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기 위한 맞불 집회를 개최했다.

이필수 의협 회장은 "간호법 제정이 아니더라도 기존 의료법과 보건의료인력지원법 개정을 통해 충분히 간호사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으며, 모든 보건의료직역 종사자가 양질의 복지와 처우를 누릴 수 있다"며 "지금이라도 돌이켜 동료 직역과 상생하고 협업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인식을 각성해주길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주최 측 추산 5만여명이 참여한 대한간호협회의 ‘간호법 제정 총궐기대회’ 모습. / 간협
주최 측 추산 5만여명이 참여한 대한간호협회의 ‘간호법 제정 총궐기대회’ 모습. / 간협
곽지연 대한간호조무사협회장은 "간호법은 다른 직역의 업무 범위를 침해하고, 보건의료체계에 혼란과 갈등을 조장하는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악법이다"며 "간호법 때문에 간호조무사는 오히려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피해를 입게 생겼다"고 지적했다.

범의료계의 이러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다소 간호단체 쪽에 기울어져 있다.

실제로 이번 13개 보건의료연대 집회에 국회의원이 참석하지 않았지만, 간호단체 집회에는 더불어민주당 김성환 정책위의장, 정춘숙 복지위원장, 김성주, 이상민, 김상희, 김민석 의원 등을 비롯해 국민의힘 유의동, 박대출 의원까지 나와 지원사격했다.

패스트트랙 카드까지 거론하며 간호법 제정을 완료시키겠다는 야당의 의지와 함께 윤석열 대통령이 간호법을 공약으로 내세운 터라 국민의힘에서도 간호법을 발의한 최연숙 의원과 10여명의 의원들이 지지 의사를 밝힌 상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전까지 대규모 파업까지 예고하며 ‘투쟁’하겠다는 범의료계는 점차 ‘업무영역 침탈’ 및 ‘생존권 위협’으로 집회 성격을 바꾼 상태다.

대한보건의료정보관리사협회는 간호법이 제정되면 ‘진단명 및 진단코드 관리’ 등 엄무침탈이 벌어진다고 지적, 대한방사선협회도 간호사 업무영역 확대로 타 직역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의사면허법 패스트트랙까지 추진하려는 여당…의료계 후폭풍 예고

현재 야당은 간호법과 함께 의사면허법까지 패스트트랙에 태우자는 발언이 나오면서 파장이 예고된 상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야당 의원들은 국회법 제86조 3항에 따라 법사위 회부 후 이유 없이 60일이 지난 법안은 소관 상임위에서 여·야 간사간 협의 또는 무기명 표결(재적 위원 3/5 찬성)을 거쳐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다는 규정을 적극 활용하겠다고 주장했다.

의사면허법은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의사의 면허를 취소하는 것을 골자로 한 의료법 개정안으로, 해당 법안 또한 법사위에서 1년 이상 계류 중이다.

이에 지난달 열린 국정감사에서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을 비롯해 남인순 의원이 의사면허법 추진이 다시 시작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갈수록 의료계에 불리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다만 여당 의원까지 합세한 간호법과 달리 아직 의견이 합치되지 않은 의사면허법은 좀 더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라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는 게 국회 관계자들의 입장이다.

1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갈등과 간호사를 제외한 모든 의료직역이 간호법을 반대하고 있는 탓에 보건의료계가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간호법 정쟁이 길어질 수록 의료직역간 불신이 국민 보건의료 현장을 악화할 시킬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보건의료 관계자는 "최근 간호사들과 나머지 직역간의 사이가 굉장히 어색해진 상황이다"며 "각자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 단체에 소속된 의료직역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있어 굉장히 불편한 상태다"고 설명했다.

이태연 정형외과의사회장은 "의사뿐 아니라 방사선사, 간호조무사 등 병원 내 다른 직원들도 집회 문자를 받았다"며 "사실 병원 내에서는 의사, 간호사 모두 가족처럼 지내는데 의료 직역간 화합을 깨는 것 같아 개탄스럽다"고 토로했다.

김동명 기자 simalo@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