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5대 가상자산 거래소 고팍스가 그동안 가상자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업체들을 대상으로 상장 대가 형태의 상장피(listing fee)를 요구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고팍스 직원이 상장 댓가로 상장피(Listing fee)를 명시해 청구했다./ IT조선
고팍스 직원이 상장 댓가로 상장피(Listing fee)를 명시해 청구했다./ IT조선
13일 IT조선이 입수한, 한 가상자산 프로젝트의 고팍스 상장 문의 메일에 따르면 고팍스는 해당 프로젝트에게 거래소 상장을 조건으로 상장피(Listing Fee)를 청구했다. 메일 발신자는 고팍스 일반직원이고, 고팍스 이사급 임원이 참조돼 있다. 이들은 거래소의 마케팅과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요구한 금액의 규모는 프로젝트에 따라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 가량이다. 고팍스는 해당 금액을 달러 혹은 동일한 금액의 비트코인으로 지불할 것을 요구했다.

고팍스는 상장피 요구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고팍스 관계자는 "운영비 명목으로 받은 것"이라며 "만일 상장 심사 과정에서 프로젝트의 상장이 취소되면 비용을 전액 돌려줬으며, 상장시에는 세금계산서도 발급했다"고 설명했다.

상장피란 가상자산 거래소가 상장 심사 통과를 명분으로 요구하는 대가를 통칭한다. 통상 거래소들은 운영비, 마케팅비, 유동성 비용 등을 구실로 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상자산 업계는 그간 상장피의 존재를 쉬쉬해왔다. 상장을 댓가로 금전을 주고받을 경우 상장 여부를 결정하는 거래소들은 신뢰성이 훼손되고, 상장된 프로젝트는 공정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내 가상자산 벤처캐피탈 관계자는 "그간 고팍스에 상장된 코인중에는 제대로된 심사가 이뤄진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인 수준의 프로젝트도 많았다"며 "이들에게 댓가성 상장피를 제공받은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상장피 수취에 대한 처벌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관련 규정이 없고 제반 비용 충당을 이유로 내세울 경우 불법성 여부를 따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가상자산 거래소 관계자는 "한국거래소의 경우 유가증권시장 상장 규정 시행 규칙을 통해 상장 수수료를 안내하는 정상적인 절차를 거친다"며 "하지만 이메일을 통해 상장피를 요구하고, 부실한 가상자산을 상장한다면 부정청탁 문제가 불거질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규제당국 또한 이러한 상장 행위에 대해선 엄벌하겠다는 입장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021년 5월 배포한 가상자산 거래 관리방안을 통해, "가상자산 거래소들이 상장 관련 편의 제공을 조건으로 별도의 대가를 받거나 가치없는 가상자산을 발행 및 판매하는 것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상 배임 및 사기, 유사수신행위 등으로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금융위의 이러한 가이드라인이 단순한 요식행위에 불과, 상장피 요구가 근절되지 않은 것이라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부실한 가상자산을 상장하더라도 해당 가상자산의 건전성 여부를 판별하기 힘들 뿐더러, 아직까지 관련 법이 정비되지 않아 처벌 규정도 마땅치 않다. 이에 업계에서는 거래소들의 상장피 요구 논란이 최근까지도 심심치 않게 불거지는 모양새다.

강민주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는 "거래소가 상장피라 불렀을 뿐 운영비, 기술비용으로 쓰였다고 주장하면 기소시 법리구성이나 증거수집이 쉽지 않다"며 "상장피를 수취해도 거래소가 영수증과 문서를 유지관리비로 보관・제출해 실제 특가법상 처벌받은 사례가 없다"고 설명했다.

한편 고팍스는 지난 3일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소 바이낸스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며 새로운 최대주주를 맞았다. 이준행 고팍스 대표는 같은달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으며, 대표 직함을 유지하고 있다.

원재연 기자 wonjaeyeon@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