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는 처음부터 사기였던걸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무리라는 지적이 많다. 대놓고 친 사기라고 하기엔 너무 큰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이들을 둘러싼 시장과 규제 움직임은 모두 계산 밖이었고,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블록체인 업계는 물론 당사자들 조차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신현성 차이코퍼레이션 대표와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간의 갈등도 뜻밖이었다. 신씨는 최근 들어 언론을 통해 "사실 2020년부터 이미 권씨와 결별한 상태였다"고 토로했다. 지난 몇 년간 진행된 테라의 사업에 본인은 관여한 바 없으며, 테라의 알고리즘 붕괴 또한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초기 창업자들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정확한 시점은 분명치 않다. 그나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지점은 차이와 테라가 각자 결제 플랫폼과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라는 정체성을 강화해 나가기 시작한 2019년 후반 언저리다.

‘핀테크 스타트업’ vs ‘크립토 네이티브’

"권도형이 지나가는 말로 ‘신 대표가 자꾸 삽질을 한다. 내가 그냥 차이를 사버리든지 해야 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차이가 테라의 성장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했다."

한 회사 관계자의 말처럼 두 사람 사이의 잦은 반목은 테라와 차이 내부에선 이미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이었다. 상하관계를 따지자면 초기 투자금 유치부터 건물 임대까지 모두 신씨의 수고로 이뤄진 만큼 그가 우위였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테라가 성장하면서 권씨의 발언권이 점차 강해졌고, 두 사람은 조금씩 의견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2020년 2월, 디파이(Defi, 탈중앙화금융) 시장의 TVL(Total Locked Value, 예치 자산 총합)은 10억달러(약 1조원)을 넘겼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디파이에 눈 뜬 권도형은 이러한 추세를 발판 삼아 테라를 더욱 키우고자 했다.

차이가 핀테크 기업으로 성장하길 바라던 신씨는 사업의 방향성부터 내부 조직 문화까지 스타트업스러움을 추구했다. 그는 비록 가상자산 결제를 도입했지만 최대한 합법적인 길 안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여느 스타트업처럼 구성원 중심의 근무 환경을 조성하려 했고 재택근무와 같은 문화도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반면 권씨는 점차 기존 스타트업과는 결이 사뭇 다른 블록체인 업계의 문법을 받아들이며 테라를 ‘크립토’ 친화적 프로젝트로 만들고 싶어 했다. ‘크립토스러움’ 이란 이들의 말을 빌자면 수평적 문화를 넘어 SNS를 통해 홀더(토큰 보유자)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서비스를 위해서는 밤을 새워 개발하는 공격적이고 성장 중심의 문화다.

디파이라는 ‘규제 회색지대’에 놓인 위험도 기꺼이 감수한 시도에서도 권 씨의 이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페이스북의 리브라 마저 규제당국의 뭇매를 맞고 사업 방향을 수정했지만, 권도형씨는 신현성씨의 반대에도 테라 기반 금융 생태계를 공격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완전히 갈라섰지만…쇼윈도 파트너십 유지

결별은 서서히 그 조건을 갖춰 나갔다. 테라폼랩스 설립 당시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발행주식을 각각 1주씩 보유했다. 이후 2019년 말 테라폼랩스와 차이코퍼레이션은 각각 신주를 발행해 갖는 방식으로 경영권을 서로에게 넘겼다. 2020년 3월, 신현성씨는 퇴사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고 신씨는 테라 경영에서, 권씨는 차이의 경영에서 손을 뗐다.

이전까지 양쪽을 오가며 근무하던 다른 초기 창업 멤버들도 이를 기점으로 각자 차이와 테라로 나뉘어 흩어졌다. 다만 차이로 넘어간 사람들은 자기 몫의 루나를 포기해야만 했다. 대다수 초기 창업자들은 테라에 남았지만 권 씨와 큰 갈등을 빚던 창업자들과 많은 직원들이 신 씨를 따라나섰다.

 가즈아랩스와 지구전자결제는 2019년 6월부터 2020년 7월까지 성수동 JK타워 각각 4층과 3층에 위치했다. 이후 가즈아랩스는 테라폼랩스가 있던 블루스톤타워 2층으로 사무실을 옮긴다. 사진은 블루스톤타워 2층 테라폼랩스 사무실 / 출처=사람인 테라폼랩스 채용공고
가즈아랩스와 지구전자결제는 2019년 6월부터 2020년 7월까지 성수동 JK타워 각각 4층과 3층에 위치했다. 이후 가즈아랩스는 테라폼랩스가 있던 블루스톤타워 2층으로 사무실을 옮긴다. 사진은 블루스톤타워 2층 테라폼랩스 사무실 / 출처=사람인 테라폼랩스 채용공고
테라폼랩스와 가즈아랩스는 성수동 블루스톤타워 2층으로, 차이코퍼레이션은 성수동 카페거리를 가로질러 도보 10분거리에 위치한 JK타워로 사무실을 옮겼다. 강남에서 성수로 둥지를 옮기며 사무실은 떨어졌지만, 표면적인 협업관계가 이어졌던 만큼 양쪽의 왕래는 여전히 잦았다.

두 회사가 분리된 후 차이와 테라의 사업 방향은 본격적으로 결을 달리하게 된다. 사무실까지 따로 쓰게 되며 많은 인재를 떠나보낸 권씨는 국내에서 블록체인 창업을 시도하던 개발자들을 흡수하고 지인들을 불러모아 인원을 확충한다. 이후 6월, ‘테라-루나’ 사태를 촉발한 ‘앵커 프로토콜’의 백서를 공개한다.

테라를 거친 한 직원은 "급하게 새로 엔지니어들을 뽑아서 가르치면서 개발을 했다. 그만큼 엉성했고 오류도 많았다. 사실 앵커프로토콜이 해킹을 당한게 아니라 다른 이유로 무너진 게 신기할 정도"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차이 역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신씨의 테라 퇴사 후 차이는 그해 한화증권, 소프트뱅크벤처스, SK네트웍스, 하나금융 등으로부터 총 880억원의 투자를 유치한다. 이를 기반으로 차이는 실물 체크카드 ‘차이카드’를 발행하고 결제솔루션 업체 ‘아임포트’를 인수하는 등 핀테크 사업에 더욱 집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겉으로는 ‘쇼윈도 파트너십’을 유지했다. 차이와 테라는 여전히 두 시스템의 연결을 홍보했고, 테라 블록체인은 계속 차이의 데이터를 받아와 결제가 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두 사람이 완전히 틀어지게 된 후에도 신씨는 권씨의 결혼식 주례에도 서며 서로간의 유대를 강조했다.

원재연 기자 wonjaeyeo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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