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와 차이가 각자도생을 시작한 이후에도 한 동안 협업을 이어갔다. 앵커프로토콜 등장 이전까지 내세울 만한 사업 모델이 없었던 테라폼랩스는 차이와의 연동 해제 이후에도 KRT(원화 기반 테라스테이블코인) 자전거래를 통해 표면적으로는 결제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러프로토콜과 앵커프로토콜의 잇따른 성공으로 권도형과 신현성, 두 사람의 입지는 한순간에 바뀌었다. 테라를 떠난 신현성씨는 새로운 블록체인 프로젝트 ‘볼트(Bolt Finance)’를 구상하지만, ‘테라·루나’ 사태를 맞아 포기해야 했다.

테라, 차이와 결별 이후에도 ‘자전거래’로 결제

차이와 테라는 공식 결별을 선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부 관계자들은 2020년 5월쯤 두 회사가 갈라섰다고 회고한다. 테라폼랩스는 그 후에도 테라 블록체인에서 차이 결제가 가능한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어디까지나 껍데기 결제였다. 이전까지 차이는 원화가 입금되면 이를 테라폼랩스로 보내 KRT로 변환했고, 이후 결제가 일어나면 사용자 지갑에서 가맹점으로 KRT를 전송한뒤 원화로 바꿨다. 결별 이후 테라는 차이로부터 돈을 받지 못했지만 결제 데이터를 자사의 블록체인에 반영했다. 테라 블록체인 내에서 KRT 자전거래 처리한 것이다.

차이 관계자는 "테라와 차이간 연결을 담당하던 주요 개발진이 테라 쪽으로 넘어갔다. 테라는 이후로도 차이 결제내역을 계속 받아가고 있었는데, 우리는 이를 나중에야 알고 항의했다. 하지만 테라측은 데이터 빼가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연동이 끊어진 후에도 두 사업체가 단호하게 선을 긋지 못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테라폼랩스 입장에서는 앵커 등장 전까지 내세울만한 이렇다 할 사업모델이 없었다. 실물 없이 데이터만 주고받다 보니 테라 블록체인에 반영된 차이 거래량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창업자 개인간 지분 정리가 마무리된 2020년 12월, 테라가 처리한 차이의 거래량은 전달에 비해 무려 반토막이 나기도 했다.

 2021년 9월 이후 테라 블록체인의 차이 결제정보/ 차이스캔
2021년 9월 이후 테라 블록체인의 차이 결제정보/ 차이스캔
애매모호한 관계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차이는 2021년 5월 서비스 내에서 KRT로 직접 결제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 요식행위 수준의 마케팅 제휴를 이어갔다. 이러한 껍데기 결제는 앵커의 성공으로 테라에게 차이가 필요 없어진 2021년 9월경까지 이어졌다.

한 블록체인 업계 관계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차이스캔으로 테라 블록체인이 처리하는 차이 결제량을 항상 눈여겨 보았는데 어느 순간 거래량이 10분의 1로 줄었다. 차이 거래량 자체가 줄어든 게 아닌데 그랬다. 데이터 정합성이 맞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조(兆) 단위 대박 날린 신현성, 권도형과 결별 재기 꿈꿔

"내기를 크게 하는 모임이 있다고 해서 가봤다. 이들에게 어떻게 돈을 벌었냐 했더니 ‘루나’ 라고 하더라. 몇억이 수백억이 됐다고 했다. 최고급 멤버십 바에서 몇백만원짜리 와인도 편하게 마시며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가즈아랩스(커널랩스) 임원들을 만난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많은 이들이 테라폼랩스를 거친 대부분 사람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 100원선에 거래된 루나 가격은 2021년 말 12만원을 넘어갔다. 테라폼랩스로 넘어간 일부 창업자들은 당사자 뿐만이 아니라 주변인들까지도 루나에 투자했으며, 이들이 얻은 수익은 수백배를 우습게 넘겼다.

다만 모든 관계자가 대박이 난 건 아니다. 두 회사가 갈라진 후 양쪽 직원들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테라폼랩스에 초기 입사한 직원들은 루나를 100~200원대의 낮은 가격에 살 수 있는 선택권, 주식으로 치면 스톡옵션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테라를 떠났거나 차이로 넘어간 이들 대다수는 약속된 양의 루나를 받지 못했다.

신현성씨 역시 자기 몫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검찰은 테라폼랩스 관계자들이 챙긴 부당이익을 총 4629억원, 신씨의 경우 보유 루나를 높은 가격에 현금화했을 경우, 최소 이익을 1400억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신씨는 2020년 초반 권도형과 결별 당시 본인에게 배당된 루나 7000만개 중 80%인 5600만개를 이미 넘긴 상태였다. 신씨가 포기한 루나 가치는 당시 가격으로 조단위가 넘어갈거란 업계 진단이다.

첫 발도 못 뗀 ‘볼트’ 프로젝트

신현성씨가 느낀 아쉬움은 클 수 밖에 없었다. 앵커프로토콜은 등장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 루나 가격을 수직으로 끌어올렸다. 테라를 창업할 때만해도 초보 창업자였던 권도형씨는 세계적 거물이 됐다.

신씨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2021년 말, 그는 가상자산과 관련된 규제가 어느 정도 안정돼 있다고 판단, 여러 디파이(Defi)와 블록체인 서비스를 중개하는 볼트 프로젝트(Bolt Finance)를 준비한다.

볼트 파이낸스 트위터 / 트위터 캡쳐
볼트 파이낸스 트위터 / 트위터 캡쳐
한 벤처캐피탈 관계자는 "볼트는 투자부터 굉장히 폐쇄적으로 진행했다. 신씨가 주변에서 ‘왜 루나 투자에 안들어갔냐’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신물이 났다고 했다"며 " 가상자산사업자(VASP) 라이선스를 획득한 기업을 인수해 원래 테라가 들어가있던 곳으로 사무실도 옮기고 제대로 하려는 모습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새로운 프로젝트는 첫 발도 떼지 못한 채 시작 단계에서 사업을 접었다. 2022년 5월 9일, 2조원 규모의 테라 UST 대량 매도로 시작된 이른바 ‘테라·루나’ 폭락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볼트 프로젝트는 5월 12일 종료됐고 이를 진행하던 앰프랩스(현 라이트스케일)는 2022년 말, 위믹스 380만개(약 100억원)에 위메이드에 넘어갔다.

원재연 기자 wonjaeyeon@chosunbiz.com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