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PC 하드웨어에 관심이 많던 A씨는 얼마 전 고장난 CPU 수리를 위해 용산을 찾았다 난감한 일을 겪는다. 자신이 CPU를 구매했던 상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임대문의>라는 종이만 썰렁하게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A씨는 자신이 구매한 CPU가 인텔 정품이고, 이 경우 인텔 공식유통사를 통해 바로 A/S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다. 그래서 이왕 용산에 온김에 그 곳으로 찾아가 보기로 하고, 수소문 끝에 서비스를 해주는 유통사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A씨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정품이라고 생각하고 써 오던 믿어 의심지 않았던 자신의 CPU가 알고보니 정품이 아니라 말로만 듣던 그레이(병행수입) 제품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실상 A/S가 어렵다는 것이다. 기가막힌 A씨는 '그럴리가 없다. 분명 업주로부터 정품이라는 말을 듣고 샀다'며, 애꿋은 A/S 센터 직원을 잡고 항변을 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역시 정품이 아니었다는 말뿐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자신이 직접 시리얼 넘버를 조회해 봤지만 혹시나 했던 기대는 역시나라는 것을 확인했을 뿐, 자신의 CPU가 그레이 제품이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결국 A씨는 '좀더 일찍 정품 확인을 해볼 걸'이라는 후회와 함께 분하고도 허탈한 마음으로 센터를 나선다.

위의 사례는 실제 그레이(병행수입제품) CPU를 구매해 피해를 본 어느 유저의 경험담과 인텔 공식유통사에서 최근 빈번하게 겪고 있는 일련의 사례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대다수의 유저들에게 있어 위의 사례는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최근 1년 사이 CPU를 구매한 유저라면 공감하는 이도 꽤 있을 것이다.

만일 자신이 구매한 제품이 소위 말하는 '그레이(병행수입)' 제품이라는 것과 인텔 공식유통사를 통한 정식 A/S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샀다면 크게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자신의 제품이 그레이인지 정품인지 모르고 구매한 사람이라면, 또 그레이 제품은 정식 A/S가 안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구매한 사람이라면 위의 사례를 눈여겨 보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운이 나쁘다면 위와 같은 경우를 당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문제가 최근 1년 사이 그레이 제품의 유통이 갑작스럽게 늘어남에 따라 소비자는 물론 업계의 피해도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정품? 그레이? 무슨 차이죠?

우선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정품과 그레이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현재 시장에서 판매되는 CPU는 크게 정품박스와 정품 벌크, 그레이 박스와 그레이 벌크 등 네 가지 제품으로 나뉜다.

정품 박스의 경우 CPU와 CPU쿨러가 박스에 포장된 형태의 제품을 말하며, 정품 벌크의 경우 여기에서 박스를 빼고 판매하는 제품을 말한다. 정품은 모두 인텔에서 공인하는 정식 유통사, 즉 인텔의 총판이라 불리우는 세 업체(인텍앤컴퍼니, 코잇, 피씨디렉트)에서 유통되며, A/S 역시 이 세 업체를 통해 정식으로 받을 수 있다. 또한 세 업체 중 어디에서 구매를 했든 상관없이 A/S가 가능하기 때문에 일말의 불안감도 가질 필요가 없는 '보증된 제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레이 제품도 마찬가지로 박스와 벌크의 차이가 박스가 있냐 없냐의 차이 정도로 구분된다. 다만 그레이의 경우 위에서 말한 세 업체를 통해 수입된 제품이 아닌 전문 수입상 또는 소위 보따리 상인이라 불리우는 개인 상인들에 의해 수입된 제품이라는 점에서 정품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 제품의 경우 인텔의 정책상 정식 총판인 3사를 통한 A/S가 불가능하며, 자신이 제품을 구매한 구매처에서 A/S가 가능하다. 때문에 인텔코리아는 인텔이 인정한 공식 유통업체인 3사를 통해서 제품을 구매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참고로 정품과 그레이 제품의 경우 유통 경로의 차이와 A/S 정책의 차이만 있을 뿐 실제 제품의 제원이나 성능, 안정성 등은 전혀 차이가 없는 '똑같은' 제품이다. 물론 유통 구조와 A/S에 대한 차이 등으로 인해 그레이 제품의 가격이 다소 저렴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비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가격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 올 2월 초순부터 적용될 새로운 인텔 정품CPU 스티커


 

- 그레이 제품 왜 문제인가?

그레이 제품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상당수의 그레이 제품이 정품과 아무런 구분 없이 팔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품의 경우 정품인증 스티커가 CPU 박스에 붙어 있지만 대다수의 소비자들이 이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CPU를 구매하더라도 이게 정품인제 그레이인지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사용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일부 부도덕한 업자들의 경우는 그레이를 정품으로 속여서 파는 비양심적인 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심지어는 정품 박스에 그레이 제품을 넣어서 파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때문에 정품인줄 알고 인텔 공식 유통업체를 찾아와도 A/S를 받을 수 없는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럼 구매처에서 A/S를 받으면 되지 않나?'라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비록 인텔 공식 유통사는 아닐지라도 만족스러운 A/S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판매상도 많다. 게다가 제품에 특별히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니, 가격적인 이점까지 생각한다면 그레이를 고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다만 추후 A/S에 대한 부분까지 감안해서 CPU를 고르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체계적인 A/S 정책을 갖춘 정품 제품이 더 유리할 것이다.


- 그레이 제품 얼마나 늘었나?

작년 5월부터 인텍앤컴퍼니, 코잇, 피씨디렉트 등 인텔 공식 유통사가 그레이 제품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인텔의 정품 인증 사이트인 리얼CPU (www.realcpu.co.kr)를 통해 색다른 행사를 진행한 바 있다. 고객이 구입한 제품의 시리얼넘버(S/N)를 조회해 조회한 제품이 그레이 제품일 경우 아래와 같이 휴대폰으로 바나나 우유를 교환권을 지급하는 행사가 그것이다.

행사가 시작된 이후 12월까지 이벤트에 참여한 고객 수는 월 평균 약 300 ~ 400여 명 정도 되고, 이 가운데 그레이 제품으로 판명된 제품의 수는 평균 100건 이상이나 되고, 그 건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와 관련해 인텍앤컴퍼니의 한 관계자는 "아래와 같이 구입한 제품의 정품 여부를 확인한 고객 수는 CPU구매 고객 가운데 2% 내외로 파악되며, 더 많은 고객 분들이 그레이 제품을 정품값을 지불하고 제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준다"라고 전했다.

이처럼 그레이 제품이 갑자기 늘어나게 된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정품CPU와 그레이 CPU에 대한 정보와 이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 등이 고객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으며, 그러다보니 고객들도 정품과 그레이를 크게 따지지 않고 구매하게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정품과 그레이의 차이와 A/S 체계에 대해 고객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은 인텔측의 잘못도 있다.

또한 이러한 점을 악용한 일부 업자들이 그레이를 정품인 것처럼 속여팔면서 피해는 더 커지게 됐고, 이에 따라 그레이 제품에 대한 수입도 무분별하게 늘어된 것이다. 결국 그 피해는 소비자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 밖에 없게 됐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레이 CPU는 정품과는 달리 인텔에서 공인한 정식 유통사를 통해 유통된 제품이 아니고, 따라서 이들 총판을 통해 A/S도 받을 수 없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이어지는 2부 기사에서는 정품 CPU와 그레이 CPU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과 정품 CPU 구매 전 주의해야할 사항 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IT조선 홍진욱 기자 honga@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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