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비박사 석주명의 논문과 저작물들을 찾아 수집하는 것에 편집증이 잠시 발병했던 적이 있다. 전부터 우리나라 초기 박물학(博物學, 일제시대 생물학은 박물학으로 통칭하였음) 관련 자료를 모으는데 도움을 주던 일본 진보쵸(神保町, 동경에 있는 고서점 상가)의 한 서점 주인이 식물 쪽에 관심이 많던 사람이 왜 갑자기 곤충에 관심을 보이냐며 아주 헐값에 소개해 준 잡지가 있다. 1930년대 일본에서 발간됐던 기초과학 잡지 '식물과 동물(植物及動物, Botany and Zoology)'이다. 이 잡지는 석주명 박사의 나비연구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됐던 10여편 이상의 논문이 실려 있어 기회가 되면 꼭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 자료를 한꺼번에 득템하고는 며칠 동안 혼자 들떠 지낸 적이 있다. 잡지의 목차를 조심스럽게 살피던 중 나는 석주명 말고도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한 또 다른 조선 사람인 듯한 이름을 발견했다. 계응상(桂應祥)이었다.

인터넷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나무위키', '위키백과' 등에 계응상에 대한 약력이 소개되어 있고, 몇몇의 검색어로 찾은 정보들로 그가 당시 조선 사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인터넷 정보 사이트들이 제공하는 자료 간에는 차이가 많다. 제시한 자료의 분량도 그렇지만 그의 출생연도부터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1900년, 위키백과에는 1893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1920년대 초 일본 도후쿠(東北)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보아 1893년 출생한 것이 정확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마저도 확인이 필요하다.

계응상이 1937년 발행된 '식물과 동물(植物及動物)' 제5권에 발표한 논문 「가잠(家蠶)에 미치는 알콜의 영향(Effect of Alcohol on the Silkworm, Bombix mori) I~III)」은 여러 호에 걸쳐 시리즈로 게재되어 있다. 적당량의 술을 뿌린 뽕잎을 먹은 누에가 성장이 더 왕성하다는 것에 착안해 당시 일본에서 행해지던 관행의 잠사기술에 대해 원인을 밝히고자 한 연구결과로 보인다. 알콜 농도를 서로 다르게 처리한 뽕잎을 먹인 누에의 실샘(누에가 실을 뽑는 기관) 발달 정도를 해부학적으로 검증한 내용인데 이 논문들이 시리즈로 발표되고, 더군다나 제5권 제2호에는 첫번째 논문으로 게재했다는 점으로 이 논문의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

1937년 일본 동경에서 발간된 기초과학 잡지 ‘식물과 동물(植物及動物) 제5권 제2호 표지(좌)와 계응상이 발표한 논문에 게재된 누에 실샘의 해부도(우). 공동저자인 규슈대학 다나카 요시마로(田中義磨)는 이후 일본의 제2대 일본유전학회회장을 지냈을 정도로 당시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자였다.
1937년 일본 동경에서 발간된 기초과학 잡지 ‘식물과 동물(植物及動物) 제5권 제2호 표지(좌)와 계응상이 발표한 논문에 게재된 누에 실샘의 해부도(우). 공동저자인 규슈대학 다나카 요시마로(田中義磨)는 이후 일본의 제2대 일본유전학회회장을 지냈을 정도로 당시 국제적으로 저명한 학자였다.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계응상은 일본의 우에다(上田)잠사전문학교를 거쳐 규슈(九州)제국대학을 졸업했고, 이후 도호쿠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아무리 우수한 연구업적이 있어도 식민지 조선인이 일본에서 정규직업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려웠던 때라 박사학위 취득 후 계응상은 동경고등잠사학교 임시교원을 거쳐 1930년부터 중국 중산대학(中山大學)에서 유전학 교수로 1938년까지 재직한다. 그러나 당시 중일전쟁으로 일본과 중국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더 이상 중국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것이 어렵게 된 그는 1940년 귀국해 수원 농사시험장, 황해도 재령 잠업연구소에서 양잠연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친일파로 몰리게 되면서 고향이 평안북도였던 그는 월북해 1949년 북한의 중앙잠업시험장장으로 재직하게 된다.

계응상은 1949년 북한 최초의 농학박사학위를 받은 인물로 검색되는데 1950년대 북한의 농학연구소장과 농업성 농업과학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관료로서도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줄곧 누에 육종연구에만 매진했던 그가 공산정권하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다만 월북을 선택한 그를 북한정권이 정치적으로 활용한 흔적들과 1967년 당시로서는 일어나기 힘든 교통사고로 죽게 되는 과정은 의문점이 많다. 당시 구소련의 사이비 유전학(리센코(Trofim Lysenko)의 주장으로 획득형질의 유전을 절대 이론으로 삼아 당시 공산권 국가에서 추종하던 유전학)을 거부했던 계응상이 북한정권의 특정정파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왼쪽부터) 계응상(1893∼1967)과 구소련의 과학자 리센코(Trofim Lysenko, 1898∼1976)는 같은 정치적 환경에서 선택한 학문적 소신은 정반대였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위키백과
(왼쪽부터) 계응상(1893∼1967)과 구소련의 과학자 리센코(Trofim Lysenko, 1898∼1976)는 같은 정치적 환경에서 선택한 학문적 소신은 정반대였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위키백과
정치적 이념에 휘말리거나 편승한 과학자들의 삶은 대부분 비극적이거나 아름답지 못한 궤적으로 남는다. 기실 리센코이즘(Lysenkoism)으로 대별하는 과학자의 잘못된 신념과 정치이념과의 모순된 결합은 언제나 파국으로 끝난다. 그러한 면에서 공산주의 이념이 지배했던 동시대를 살았던 계응상과 리센코의 학자로서의 삶을 비교해 볼만하다.

당시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초파리를 재료로 한 모건(Thomas Morgan, 1933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의 유전학이나 멘델(Gregor Mendel)의 유전학을 부르조아 학문으로 배척했으나 계응상은 북한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초파리를 이용한 유전학 실험을 했고, 교잡을 통한 다양한 누에의 품종을 만드는데 성공하는 등 누에 육종분야에서는 국제적으로 수준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국제학술대회에서 리센코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이후에도 소련을 방문해 리센코와 직접 학문적 논쟁을 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 보면 당시 소련의 눈치를 봐야하는 북한 정권으로서는 살려두기 껄끄러운 상대가 아니었을까?

최근까지 멘델의 유전법칙으로 설명이 곤란한 새로운 유전현상이 많이 확인되고, 획득형질의 유전메카니즘을 밝히고자 하는 후성유전학(epigenetics)의 발달로 당시 리센코의 주장을 재조명하자는 주장도 있다. 진화론의 입장에서는 리센코는 옳았을 수 있다. 그러나 농업적 형질을 단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그의 이론과 행위는 곡학아세와 혹세무민의 전형일 뿐이다.

근래 러시아와의 관계가 그저 그러해진 북한이 1990년 사리원농업대학을 계응상농업대학으로 개칭하고, 2010년에는 김일성종합대학의 단과대학으로 편입했다고 하니 주체를 강조하는 정권이 그의 이름을 다시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씁쓸하다.

식민지시대 국내에서 일본에 조력하며 득세했던 세력들이 해방 직후 귀국한 일본 유학 과학자들에게 터무니없는 이념적 멍에를 씌워 그들의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자진 월북을 강요했다는 정황 증거는 허다하다. 당시 수많은 과학자들의 월북과 일부의 죽임은 억울하고 안타까운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도봉섭이 그렇고, 장형두가 그렇고 석주명이 그렇다.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 확인한 것이지만 일부 온라인 백과사전의 계응상에 대한 정보는 북한에서 올렸거나 수정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많다. 짬을 내어 수정해볼 작정이지만 이제 와서 얼마나 소용이 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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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원 박사는 건국대 식물학 박사로 네덜란드 와게닝겐UR 국제식물연구소 방문연구원과 북극다산과학기지 하계연구단 고등식물연구책임자로 역임한 바 있습니다. 건국대, 강원대, 강릉대 강사를 지내고 현재 농촌진흥청 화훼과장으로 한국원예학회, 한국식물생명공학회, 도시농업연구회 이사를 겸임하고 있습니다. 한국식물학회, 한국육종학회 정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