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조선 이상훈] 예전엔 김장을 앞둔 10월이 김치냉장고 최고 성수기였지만 이제는 사계절 내내 사용하는 '보조 냉장고'로 활용 폭이 넓어지면서 김치냉장고의 판매량은 4계절 내내 고른 모양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김치냉장고 시장 규모는 연간 1조원이 넘는 수준이다. 이는 단일 품목으로는 이례적으로 큰 규모다.

 

최초의 김치냉장고는 '금성사(?)'

김치냉장고의 시작은 19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가 '김치냉장고'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첫 김치냉장고의 모델명은 'GR-063'이었으며, 광고에 의하면 내부가 스테인리스 재질로 돼 있고 내부 온도 설정이 가능했는데 직접냉각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제품의 용량은 45리터였다.


1984년 최초로 출시된 금성사의 김치냉장고(사진=LG전자)
1984년 최초로 출시된 금성사의 김치냉장고(사진=LG전자)
 
'GR-063'의 실제 모습(사진=LG전자)
'GR-063'의 실제 모습(사진=LG전자)

그러나 금성사가 첫 출시한 김치냉장고는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1984년은 아파트 보급률이 낮았고 단독주택 거주자가 많았다. 이때만 해도 김장철이 되면 항아리에 김장김치를 담아 앞마당에 묻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굳이 김치냉장고를 돈 들여 구입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GR-063은 대중화되지 못한 채 후속작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비록 금성사의 김치냉장고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냉장고 속 퀴퀴한 김치냄새를 없앨 수 있는 김치냉장고에 대해 당시 대우전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대우전자는 1984년 제품 개발에 착수해 1985년 김치냉장고 '스위트홈'을 출시했다. 스위트홈은 18리터 용량으로 매우 작았지만 김치 숙성에 적합한 온도를 설정할 수 있는 온도 다이얼을 갖췄다. 

 

1995년 출시된 대우전자의 김치냉장고(사진=동부대우전자)
1995년 출시된 대우전자의 김치냉장고(사진=동부대우전자)

삼성전자도 1992년에 김치냉장고를 출시했다. 삼성전자는 35억여 원의 개발비와 200여 명의 연구원을 투입해 기존 냉장고보다 3배 더 오래 신선하게 김치를 보관할 수 있는 김치냉장고 'SR-1570'을 선보였다. 이 제품은 1단계로 김치 전용칸 온도를 30도까지 높인 후 2단계로 사용자가 설정한 숙성 정도로 발효시키고, 3단계로 적정 보관온도인 3~5도로 급냉시켜 맛을 장기간 유지시켜 줬다. 

금성사와 대우전자·삼성전자의 김치냉장고 판매량이 거의 의미 없을 정도로 매우 적었기 때문에 그 후 한동안 김치냉장고가 출시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김치냉장고가 출시·보급된 것은 1995년, 만도기계가 김치의 옛말인 '딤채'라는 이름으로 제품을 출시하면서 부터다. 

 

김치냉장고의 본격 대중화 연 만도기계 '딤채'

당시 만도기계 사장이었던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은 1991년부터 김치냉장고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예감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최고의 김치 맛'을 찾으라고 주문했고, 그 김치맛의 비밀을 풀어 김치냉장고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냉방기계를 만들던 만도기계 연구원들은 사장의 지시로 인해 갑자기 김치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김치연구소가 세워졌으니 정몽원 사장에게 김치냉장고에 대한 성공확신과 욕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95년 당시 만도기계가 출시한 '딤채 CFR-052E' 김치냉장고(사진=대유위니아)
1995년 당시 만도기계가 출시한 '딤채 CFR-052E' 김치냉장고(사진=대유위니아)
우여곡절 끝에, 김치연구소 직원들이 3년간 100만 포기가 넘는 김치를 담그며 김치 맛과 보관법을 연구한 끝에 만도기계의 첫 김치냉장고 'CFR-052E'가 1995년 11월에 정식 출시됐다. 김치의 옛말인 '딤채'가 브랜드로 사용된 것도 이 때문이다. 금성사와 대우전자의 첫 번째 도전작이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졌지만 그 후 10년이 지나면서 아파트가 유행처럼 들어섰고, 냉장고 안에 김치 냄새가 배는 것을 싫어하는 주부들이 김치냉장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결과 첫 번째 딤채는 4000대 이상 판매되며 서서히 시장에서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딤채 김치냉장고가 세상에 나온 이후 김치냉장고의 인기는 해가 갈수록 폭발적으로 늘었다. 김치냉장고는 1990년대 후반 주부들이 갖고 싶은 가전제품 순위에서 늘 1위를 자리잡을 만큼 인기를 끌었고, 주부들 사이에서는 ‘딤채계’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딤채는 김치냉장고의 대명사 또는 동의어로 자리잡게 됐다.

김치냉장고 시장은 1995년 처음 김치냉장고 딤채가 출시된 이래 첫해 4000여 대, 이듬해인 1996년 2만 5000대, 1997년 8만 여대, 1998년 22만 8000여 대, 1999년 53만 여대로 매년 2배 이상씩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 때만 해도 딤채의 독무대였다. 

딤채 이후 가전사 앞다퉈 김치냉장고 출시

‘딤채’가 크게 성장하자 삼성전자, LG전자 등 대형 가전회사들과 여러 중소기업들도 속속 김치냉장고 시장에 다시 가세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1998년 '다맛' 김치냉장고를 출시했고, LG전자도 1999년에 '칸칸 서랍식 김치냉장고'를 출시했다. 이듬해인 2000년에는 대우전자가 '삼한사온' 김치냉장고를 출시했으니 그야말로 김치냉장고 전성시대였다.

삼성전자의 '다맛'은 김치 저장 온도를 3단계로 설정할 수 있어 최대 4개월 이상 김치를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었다. 또 맥반석 용기를 채택했으며, 김치 외에 육류와 어패류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다맛은 이후 KS 마크를 획득했고 일본에 수출되기도 했다. 

LG전자는 1999년 국내 최초로 서랍식 김치냉장고 ‘칸칸 서랍식 김치냉장고’를 출시했다. 최초의 김치냉장고 출시 타이틀에 비해 후발주자로 뛰어들었지만 2004년에 최초의 스탠드형 김치냉장고를 출시하며 스탠드형 김치냉장고 시장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것은 김치냉장고 개화기에서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의 얘기다. 

서랍식과 뚜껑식을 결합한 대우전자의 '삼한사온' 김치냉장고(사진=동부대우전자)
서랍식과 뚜껑식을 결합한 대우전자의 '삼한사온' 김치냉장고(사진=동부대우전자)

대우전자도 2000년 7월, '삼한사온'이라는 브랜드로 김치냉장고를 출시했다. 딤채와 다맛 김치냉장고가 뚜껑식이었다면 대우전자의 '삼한사온'은 서랍식 아래층과 뚜껑식 위층의 2중 구조로 돼 있어 좀 더 다양한 김치와 식재료를 분리 보관할 수 있었다. 

특이하게도 김치냉장고 시장을 이끈 기업 3곳 모두 후에 사명이 변경됐다. 만도기계는 2003년 위니아만도로 변경한 후 2014년에는 대유 그룹에 인수되면서 대유위니아로 사명이 바뀌었고, 대우전자는 2002년 대우일렉을 거쳐 2013년에 동부대우전자가 됐다. 금성사 역시 1995년 LG전자로 사명을 변경했다. 

김치냉장고는 1990년대 후반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장 아이템이 됐다. 2002년에는 한 해 동안 약 180만대 이상 판매되며 최고 성수기를 이뤘고, 단일 품목으로 시장 규모가 연간 1조원을 넘어섰다. 이제는 김치냉장고 용량이 400~500리터 대로 커졌고 육류와 곡류도 다양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성능이 개선됐다. 냉장고와 함께 필수 혼수가전이 됐음은 물론이다.

 

이상훈 기자 hifidelity@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