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시즌과 신제품 출시라는 호재가 있어도 조립 PC 판매량은 좀처럼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조립 PC 가격이 되레 비정상적으로 비싸지면서 소비자들이 브랜드 PC나 노트북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조립 PC 수요의 거의 대부분은 ‘게이밍 PC’가 차지한다. 2021년 11월 현재 쓸만한 성능의 게이밍 조립 PC 가격은 대당 200만~300만원대를 형성 중이다. 평균 150만원의 예산이면 괜찮은 게이밍 PC를 조립으로 구매할 수 있었던 2020년 여름 시즌보다 최대 2배 올랐다.

조립 PC 가격 급등의 가장 큰 원인은 게이밍 PC의 핵심 부품인 ‘그래픽카드’ 때문이다. 암호화폐 채굴 업자들이 너도 나도 웃돈을 내며 PC용 그래픽카드를 대거 쓸어 담았고, 이 여파로 그래픽카드 가격이 정상가보다 2배에서 3배 이상 급등했다. 쓸만한 그래픽카드 가격이 PC 한대 가격에 맞먹는 100만~200만원대로 치솟으면서 조립 PC의 가격도 덩달아 치솟은 것이다.

그런데, ‘총판’이라 불리는 수입유통사들이 오히려 그래픽카드 가격 상승을 수수방관하고 있다. 급등한 그래픽카드 가격으로 인해 엄청난 마진이 발생하다 보니, 총판 입장에서는 가격 조정에 나설 이유가 없는 상황인 셈이다.

그래픽카드 가격은 제조사나 조립 PC 업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제조사가 공식적으로 제시하는 MSRP(권장소비자가격)가 있지만, 여기에 강제성은 없다. 오히려 제조사로부터 물량을 사들여 수입·물류·유통·대리점 공급 등을 전담하는 수입유통사들이 실질적인 유통 가격을 결정한다.

제조사들은 물류 및 유통과 관련된 거의 과정을 충분한 경험과 규모를 갖춘 수입유통사에 일임한다. 그 과정에서 수입유통사는 제조사가 오히려 쉽게 손을 쓸 수 없는 ‘슈퍼 을’이 되기 쉽다. 수입유통사가 가격을 비싸게 책정해도, 제조사가 이를 막을 수단이 없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래픽카드를 손에 틀어쥔 대형 수입유통사들이 이미 충분한 물량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수량만 시중에 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그래픽카드 가격이 내려가는 것을 막고, 하나라도 더 비싸게 팔아 마진을 극대화할 수 있어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규모가 큰 수입유통사일수록 그래픽카드뿐 아니라 다른 PC 부품도 함께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이용해 자신들이 유통하는 다른 PC 부품에 인기 있는 그래픽카드를 ‘끼워팔기’하는 모습도 최근 1년여 사이에 급격히 증가했다. 심지어는 별도 사업체를 신설하고, 자신들이 확보한 그래픽카드 물량을 따로 떼어다 암호화폐 채굴 사업에 뛰어든 수입유통사도 있다는 것은 이미 업계에선 공공연한 비밀 중 하나다.

현재 조립 PC 시장은 PC를 조립해 판매하는 소매점 형태의 조립업체들은 물론, 그래픽카드를 다루지 않는 중소 수입유통사들까지 거의 빈사 상태다. 조립 PC가 많이 팔려야 자신들이 공급하는 부품도 함께 팔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니 현금 회전이 막히면서 사업 자체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가격을 유지하는 브랜드 완제품 PC나, 데스크톱 못지않은 성능의 ‘게이밍 노트북’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그만큼 조립 PC는 더더욱 팔리지 않고, 시장에 돈이 돌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조립 PC 시장은 위에서 언급한 대형 수입유통사뿐 아니라, 수많은 중소 수입업체와 그보다 더 많은 영세 조립 PC 업체가 소상공인으로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하나의 산업 생태계다. 그 위용이 예전만 못하지만, 1990년대 PC 보급에 한몫해 국내 ITC 산업 성장의 기틀을 닦는 데 기여한 유서 깊은 산업이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립 PC 업계는 중견 이하 중소기업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달 PC 시장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만큼 조립 PC 시장이 붕괴하면 국내 ITC 산업에 어떻게든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한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일부 수입유통사들이 취하는 그래픽카드 폭리에 대해 정부 및 유관 기관의 본격적인 모니터링과 정책적인 개입이 필요해 보인다.

최용석 기자 redpriest@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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