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가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에 이어 또 하나의 ‘빅딜’을 추진한다. 영국에 본사를 둔 반도체 설계 기업 ARM이 대상이다. 90억달러(10조원)에 달한 인텔 낸드 사업 인수와는 규모가 다르다. 지분을 보유 중인 소프트뱅크가 엔비디아에 받기로 한 매각대금만 400억달러(47조5000억원)다. 4.5배쯤 더 큰 초대형 빅딜 추진을 선언한 셈이다.

‘M&A 전문가’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이 꺼내든 방안은 공동인수다. 그는 3월 30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ARM 인수합병을 위해 전략적 투자자들과 함께 컨소시엄으로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인수 방식을 언급했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대표(부회장)가 3월 31일 경기도 이천 본사에서 열린 SK하이닉스 출범 10주년 행사에서 회사의 미래 성장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 / SK하이닉스
박정호 SK하이닉스 대표(부회장)가 3월 31일 경기도 이천 본사에서 열린 SK하이닉스 출범 10주년 행사에서 회사의 미래 성장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 / SK하이닉스
이는 회사의 자금 여력과 반독점 심사 통과를 모두 고려한 판단으로 풀이된다. 앞서 ARM 인수를 추진했던 미국 엔비디아가 규제 당국의 반대로 무산된 적 있어서다. 박정호 부회장도 "ARM은 굉장히 중요한 회사로, 특정 누군가가 (인수) 이익을 다 누리도록 (반도체) 생태계 내 기업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이 때문에 지분을 공동 인수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박 부회장이 회사 명운을 건 베팅에 나선 것은 메모리에 편중된 SK의 반도체 사업을 비메모리로 다각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ARM 인수는 SK하이닉스가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기업 가치를 높이는 모멘텀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가 담겼다.

박 부회장은 주총에서 88조원쯤인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과 관련해 "200조원을 목표로 3년 동안 준비하겠다"며 "저희가 가야하는 방향에 대한 적절한 M&A(ARM)가 진행되면 3~5년, 10년 후에는 200조원, 300조원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SK텔레콤이 최근 추진 중인 AI 반도체 사업이 ARM의 칩 설계 기반 기술과 결합할 경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그래픽칩 시장의 지배자격인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하려던 목적도 이런 이유였다. SK ICT 연합은 1월 첫 시너지 성과로 사피온의 글로벌 진출을 선언했고, 미국 법인 ‘SAPEON Inc.’ 설립을 추진 중이다. SK가 ARM 지분 인수에 성공해 칩 설계 기술을 내재화 할 경우 SK ICT 연합의 AI 반도체 사업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란 기대가 크다.

핵신 전략물자로 인식되는 반도체 시장 공급망을 SK가 한축으로서 주도할 수 있는 지위를 보유하겠다는 의중도 담겼다. 그동안 하이닉스 인수, 키옥시아 지분 인수, 인텔 낸드 사업 인수 등 성공적 대형 M&A로 세계 시장에서 반도체 전문 투자 역량을 두루 인정받은 만큼 반도체 생태계 내 협력을 이끄는 기업으로 발돋움하겠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에는 박 부회장이 최근 공개적으로 ARM 인수 의사를 밝힌 이유가 SK와 소프트뱅크 양측이 어느 정도 신호를 주고 받은 것이란 해석을 내놓는다. 현금 확보를 위해 ARM 매각이 절실한 소프트뱅크가 SK에 ‘SOS’를 요청했다는 분석이다.

박 부회장은 SK텔레콤 전무 시절부터 손정의 회장과 일본에서 첫 미팅을 가지며 각별한 인연을 이어왔다. 일본 도시바메모리(현 키옥시아) 인수를 성사시킬 당시에도 박 부회장은 최태원 회장과 함께 손 회장을 직접 만나 의견을 교환한 바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여러 국가 반도체 기업에 설계기반을 제공하는 ARM이 특정 기업에 인수될 경우 산업계 전체가 난색을 표할 수 있다"며 "소프트뱅크로선 그동안 박 부회장이 보여준 M&A 역량을 감안해 컨소시엄 구성을 통한 인수에 가장 적합한 기업으로 SK를 떠올렸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