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가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에 이어 또 하나의 ‘빅딜’을 추진한다. 영국에 본사를 둔 반도체 설계 기업 ARM이 대상이다. 90억달러(10조원)에 달한 인텔 낸드 사업 인수와는 규모가 다르다. 지분을 보유 중인 소프트뱅크가 엔비디아에 받기로 한 매각대금만 400억달러(47조5000억원)다. 4.5배쯤 더 큰 초대형 빅딜 추진을 선언한 셈이다.
‘M&A 전문가’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이 꺼내든 방안은 공동인수다. 그는 3월 30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ARM 인수합병을 위해 전략적 투자자들과 함께 컨소시엄으로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인수 방식을 언급했다.
박 부회장이 회사 명운을 건 베팅에 나선 것은 메모리에 편중된 SK의 반도체 사업을 비메모리로 다각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ARM 인수는 SK하이닉스가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기업 가치를 높이는 모멘텀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가 담겼다.
박 부회장은 주총에서 88조원쯤인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과 관련해 "200조원을 목표로 3년 동안 준비하겠다"며 "저희가 가야하는 방향에 대한 적절한 M&A(ARM)가 진행되면 3~5년, 10년 후에는 200조원, 300조원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SK텔레콤이 최근 추진 중인 AI 반도체 사업이 ARM의 칩 설계 기반 기술과 결합할 경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그래픽칩 시장의 지배자격인 엔비디아가 ARM을 인수하려던 목적도 이런 이유였다. SK ICT 연합은 1월 첫 시너지 성과로 사피온의 글로벌 진출을 선언했고, 미국 법인 ‘SAPEON Inc.’ 설립을 추진 중이다. SK가 ARM 지분 인수에 성공해 칩 설계 기술을 내재화 할 경우 SK ICT 연합의 AI 반도체 사업에 날개를 달아줄 것이란 기대가 크다.
핵신 전략물자로 인식되는 반도체 시장 공급망을 SK가 한축으로서 주도할 수 있는 지위를 보유하겠다는 의중도 담겼다. 그동안 하이닉스 인수, 키옥시아 지분 인수, 인텔 낸드 사업 인수 등 성공적 대형 M&A로 세계 시장에서 반도체 전문 투자 역량을 두루 인정받은 만큼 반도체 생태계 내 협력을 이끄는 기업으로 발돋움하겠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에는 박 부회장이 최근 공개적으로 ARM 인수 의사를 밝힌 이유가 SK와 소프트뱅크 양측이 어느 정도 신호를 주고 받은 것이란 해석을 내놓는다. 현금 확보를 위해 ARM 매각이 절실한 소프트뱅크가 SK에 ‘SOS’를 요청했다는 분석이다.
박 부회장은 SK텔레콤 전무 시절부터 손정의 회장과 일본에서 첫 미팅을 가지며 각별한 인연을 이어왔다. 일본 도시바메모리(현 키옥시아) 인수를 성사시킬 당시에도 박 부회장은 최태원 회장과 함께 손 회장을 직접 만나 의견을 교환한 바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여러 국가 반도체 기업에 설계기반을 제공하는 ARM이 특정 기업에 인수될 경우 산업계 전체가 난색을 표할 수 있다"며 "소프트뱅크로선 그동안 박 부회장이 보여준 M&A 역량을 감안해 컨소시엄 구성을 통한 인수에 가장 적합한 기업으로 SK를 떠올렸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