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초, 가상자산 시장은 역사상 가장 긴 하락장을 겪고 있었다. 2000만원을 넘나들던 비트코인 가격은 1년만에 300만원 선으로 추락했고, 대다수 알트코인은 휘청거리고 있었다. 설상가상 각국에서는 가상자산 시장에 대한 규제를 본격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테라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테라의 결제 생태계 핵심을 ‘테라X’가 아닌 간편결제 서비스 ‘차이’가 등장해 자리했다. 스테이블 코인 테라의 가격 안정화를 위해 탄생했으나,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며 20만명에게 상처를 안긴 가상자산 루나(LUNA)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 이 때다.

루나 폭락의 피해자가 한국에 몰린 것은 비단 테라가 국내 프로젝트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나긴 하락장 속에 등장한 ‘스테이킹’은 투자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였고, 거래소에게도 새로운 이익 창출 수단이 됐다.

백서 재설계와 ‘루나’ 스테이킹의 도입

테라는 가상자산 결제의 대중화라는 차별화된 목표를 내걸었다. 하지만 ‘결제’라는 한 가지 수단 만으로 대중화는 역부족이었다. 테라 네트워크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춰야 회사가 내세운 할인율을 제공할 수 있었지만, 테라의 성장은 아직까지 간편결제 ‘차이’의 확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제 시장과 블록체인 생태계 양쪽이 모두 성장하기 위해서는 차이 외에도 ‘테라’만의 성장 전략이 필요했다. 구조적 한계를 깨달은 테라 팀은 테라 네트워크 자체의 규모를 키우고 유지하기 위해 백서를 재설계한다.

2019년 2월 22일, 테라의 리서치 헤드 니콜라스 플라티아스는 수정된 백서 ‘테라 머니-안정성과 채택(Terra Money-Stability and Adoption)’을 공개한다. 결제 시장 공략에만 집중하던 기존 노선에서 벗어나 테라는 본격적으로 스테이블코인으로서의 본질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변화를 결심한다.

새로운 백서에서 테라는 단일 화폐에서 여러 화폐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전략 등 시장 확장을 위한 여러 변화를 제안한다. 이중에서도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루나 가격 안정화를 위한 방법이 추가됐다는 점이다.

루나 가격은 테라 블록체인을 통해 이뤄진 결제 수수료가 모여 오르게 된다. 하지만 결제량이 늘지 않고 되려 줄어든다면, 혹은 누군가 루나를 대량 매도해 가격이 급락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루나 가격이 떨어지면 이를 담보로 하는 테라의 가격 안정 메커니즘이 흔들리고 결국 도미노처럼 전체 테라 시스템 자체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테라는 ‘위임지분증명(DPOS, Delegated Proof Of Stake)’ 방식을 도입했다. 블록체인의 위임지분증명 방식은 간략하게 다음과 같다. 개인 혹은 단체가 루나를 테라 메인넷(블록체인을 운영하는 네트워크)에 입출금 되지 않도록 스테이킹(Staking)을 하고 테라 블록체인을 검증한다. 이들을 벨리데이터(Validator), 검증자라 부른다.

검증자들은 루나를 묶어 놓은 양에 따라 차례로 상위 100위까지 테라 블록체인 운영에 참여하고 보상으로 테라 결제에서 나온 수수료를 나눠받는다. 많은 루나를 갖고 있지 않은 개미 투자자라도 루나를 스테이킹하고 블록체인 운영 참여 권한을 대형 검증자, 이를테면 거래소에게 ‘위임'하면 수익을 나눠받을 수 있다. 대량의 가상자산을 팔지 못하도록 네트워크에 묶으면 보상을 줘 생태계가 자발적으로 안정화되도록 유도한 것이다.


얼핏봐도 최근 각국 금융당국이 눈여겨 보고 있는 ‘증권성’ 형태의 가상자산이다. 블록체인 검증에 참여해 가상자산을 투자하고 보상을 받는 구조는 우리가 아는 증권 구조와 유사하다. 당시에는 이와 관련된 논쟁이 시작되지 않아 별다른 논란이 없었다.

최근에서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스테이킹을 증권으로 간주하겠다고 공표한 상황이다. 우리나라 검찰 역시 이를 빌미로 루나를 증권신고서 제출 없이 판매한 투자계약증권이라며 테라 관계자들을 기소했다.

하락장이라는 불리함 속에서 성장한 루나

테라는 새로운 백서를 기반으로 2019년 4월 23일, 메인넷 1.0 버전 ‘콜럼버스’를 런칭, 다음날 24일 최초의 루나 토큰 10억개를 발행한다. 루나의 첫 벨리데이터로는 프라이빗 세일에 참여한 해시드를 포함, 30곳이 참여했다.

일반 투자자로서 루나를 가장 먼저 접한 것은 한국인들이었다. 루나 발행 뒤 약 보름 후인 5월 7일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코인원은 세계 최초로 루나를 상장했다. 거래가 시작된 날 루나 가격은 3000원, 첫 ICO로 판매된 값에 비해 20배 이상 뛰었다.

메인넷 론칭 후 시장은 테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전체 시장은 하락장이 계속됐지만 이 덕에 사람들은 보다 가격 변동이 적은 스테이블코인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2019년 8월, 스테이블코인 거래액은 1년전에 비해 4배 이상 커졌고 새로운 스테이블코인은 30종이 넘게 등장했다. 대세에 가담한 페이스북도 그해 여름 스테이블코인 리브라(Libra) 출시 계획을 내놓았다.

테라 역시 성장에 가속도가 붙는다. 2019년 8월, 테라는 네트워크 참여자 수를 늘리기 위해 스테이킹 이자율을 10%로 높였다. 차이의 성장과 맞물려 테라 거래량은 매달 평균 35%씩 성장했다. 11월 기준 테라의 연환산 거래 규모는 9000억원을 넘겼다.

기나긴 베어마켓 속에서 스테이킹의 부상은 거래소에게도 기회였다. 소액 투자자들의 가상자산을 대신 예치해주고 수수료를 나눠갖는 수익 모델은 거래소들에게 새로운 먹거리가 됐다. 오로지 현물 거래에만 국한됐던 다른 거래소들 역시 속속들이 스테이킹 서비스를 내놓기 시작했다.

코인원은 가장 먼저 루나를 상장한 만큼 스테이킹 서비스 역시 처음으로 출시한다. 2020년 2월 코인원을 시작으로 2020년 9월 업비트, 2020년 10월 빗썸까지 국내 3대 거래소들은 모두 차례로 투자자들에게 루나 스테이킹 상품을 선보였다. 세 거래소 이용자수는 600만명을 헤아렸다.

원재연 기자 wonjaeyeo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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