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25일 세계 최초로 코인 실명제인 ‘트래블룰(Travel Rule)’이 시행됐다. 코인 실명제라 부르는 건, 자금세탁방지 차원에서 누구의 코인인지 확인하기 위해 꼬리표를 붙였기 때문이다. 수표에 비유한다면 수표 뒷면에 자신의 실지명의와 전화번호를 배서하는 것과 비슷하다.

‘트래블룰’의 법률적 용어는 ‘가상자산이전 시 정보제공’이다. 가상자산 사업자가 100만원 이상 상당의 가상자산을 이전할 때, 거래 상대방에게 송금인과 수취인의 성명 및 가상자산주소를 밝혀야 한다. 그 외 금융정보분석원이나 상대 가상자산사업자가 요청시에는 추가로 실지명의도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트래블룰(Travel Rule)을 적용한 것일까? 우리나라가 다른 국가들에 앞서 트래블룰을 시행하게 된 데에는 표면적인 이유와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표면적인 이유는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2019년 6월21일 총회에서 가상자산 사업자에 대한 구속력있는 국제기준인 주석서를 채택, 공개 성명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FATF 회원국은 2020년 6월말까지 관련 제도와 법을 정비해야 하고,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을 구축해야 했다.

우리나라도 FATF의 권고에 따라 2020년 3월24일 가상자산사업자에게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을 담은 특정금융정보법을 개정했다. 개정된 특금법은 1년뒤인 2021년 3월25일 시행됐다. 트래블룰은 가상자산사업자간 정보 공유 시스템 구축을 위해 업계 자율의 공동 솔루션을 도입할 충분한 기간이 필요함을 감안, 시행시기를 1년 유예, 2022년 3월25일에 시행했다.

더 중요한 건 실질적인 이유인데, 2020년 4월16일 발표된 FATF의 ‘대한민국 자금세탁방지·테러자금조달금지 제도에 대한 평가’ 결과에 그 해답이 있다. 우리나라의 상호평가 결과는 전체 3단계 중 중간 등급인 ‘2단계-강화된 후속점검’이다. 해당 결과는 무디스 등 국제 신용평가회사가 국가의 대외신인도를 평가하는 중요 지표로 사용되며, 결과가 나쁠 경우, 대외차입비용 증가 및 금융회사의 외국진출이 제한 등 불이익이 있다.

이에 금융당국은 상호평가 3년전인 2017년부터 ‘FATF 국제기준 해설’ 책자를 발간하는 등 준비를 진행해 왔다. 상호평가는 ‘FATF 국제기준’ 이라는, 일종의 시험문제가 공개된 평가방식이라 준비단계에서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당시 상호평가 항목 중 가장 취약했던 부분은 ▲가상자산사업자 ▲정치적 주요인물 ▲지정 비금융사업자와 전문직의 3가지 분야였다. 만약 해당 분야에 제도적 개선을 이루지 못할 경우 총 40개 항목으로 구성된 FATF 권고안의 7개 항목에서 낮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금융당국은 관련 제도 개선을 시도했지만 정치적 주요인물은 국회의원 등 정치인이 대상이라 국회를 설득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지정 비금융사업자와 전문직 항목은 부동산중개협회, 귀금속협회, 세무사협회 및 회계사 협회를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한국변호사협회 벽을 뛰어넘기가 어려웠다. 당시 변호사협회는 변호사법 제26조 ‘고객 비밀유지의무’를 들어 난색을 표했다.

금융당국은 상대적으로 법제화 실현가능성이 높은 가상자산사업자와 관련된 FATF 권고안인 ▲자금 또는 가치의 이전서비스 ▲새로운 기술 ▲전신송금 항목에 역량을 집중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트래블룰 세계 최초 시행이다. 세계 최초 코인실명제인 트래블룰를 시행 배경에는 FATF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금융당국의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본고는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일 , IT조선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지열 프로비트 이사 kebkeeper@naver.com
외환은행과 하나은행에서 29년간 근무한 정통 은행원으로 현재 가상자산 거래소인 프로비트의 자금세탁 방지본부 이사를 맡고 있다. 경찰수사연구원 외래교수와 성균관대학교 경영연구소 자금세탁방지 교수, 한국자금세탁방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한국블록체인협회, 한국투명성기구 및 광주과학기술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