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으레 김현승 시인의 시 ‘가을이 오는 날’이 읽고 싶어집니다. 그 시에 나오는 구절인 ‘그리하여 가을의 첫 입술을 서늘한 이마에 받는 달’이 너무 좋아 표절을 피해 가며 요리조리 써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하는 혼이 처음으로 네 육체 안에 들었을 때와 같이’라는 표현도 참 좋습니다.

이 시에서 김현승 시인은 가을을 이야기하면서 9월을 네 번이나 읊었습니다. 김현승 시인이 살던 시절에는 9월을 가을로 인식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9월을 가을로 아는 분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9월을 여름에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국립수목원 육림호의 가을 풍경
국립수목원 육림호의 가을 풍경
아직(?) 빼앗기지 않은 10월은 가을 소속이 분명합니다. 우리 국립수목원으로도 가을이 손님처럼 찾아왔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아직은 설익었구나 싶었는데, 일교차가 큰 날이 며칠 이어지더니 갑자기 계절이 깊어져 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만추(晩秋)입니다. 덕분에 광릉숲길도 가을색이 완연해졌습니다. 좀 더 깨끗한 가을길을 선사하고자 120여 명의 직원이 참석해 유해식물을 제거하고 산지 정화 활동을 벌였습니다.

전시원과 광릉숲길의 주변 도로와 하천의 쓰레기를 수거하고 광릉숲 수계를 따라 퍼져 자라는 유해식물인 단풍잎돼지풀까지 제거하고 나니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생물권보전지역이라는 사실이 더욱 확실해진 느낌입니다. 규제혁신의 취지로 조성된 광릉숲길은 자연과 역사와 사람이 공존하는 소통의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으며 광릉숲보전센터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산지 정화 활동을 벌여나갈 계획이라고 합니다.

명소가 된 광릉숲길의 가을 풍경
명소가 된 광릉숲길의 가을 풍경
가을 하면 역시 단풍입니다. 단풍은 기온이 낮아져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엽록소에 가려져 있던 크산토필과 카로티노이드가 드러나면 은행나무나 생강나무처럼 노란색 단풍이 됩니다. 타닌이 드러나면 참나무 종류에서 볼 수 있는 갈색 단풍이 됩니다. 갈색도 단풍이냐고 타박하는 분들께는 광릉숲의 졸참나무 단풍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붉은색 단풍은 안토시아닌이 합성되면서 만들어집니다. 단풍나무과 나무 외에 노박덩굴과나 옻나무과의 나무가 우리의 가을 산야를 붉게 수놓는 주역입니다.


은행나무의 노란색 단풍
은행나무의 노란색 단풍

생강나무의 노란색 단풍
생강나무의 노란색 단풍


육림호의 갈색 단풍
육림호의 갈색 단풍

당단풍나무의 붉은색 단풍
당단풍나무의 붉은색 단풍
정서 함양을 위해 단풍 드는 이유를 문학에서 찾는다면 미당 서정주의 ‘푸르른 날’이라는 시를 추천합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고 전주 없이 시작되는 송창식 노래이기도 합니다. 거기서 송창식은, 아니 시적 화자는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라고 말합니다. 초록이 지쳐서 단풍이 드는 거라니, 이보다 멋진 표현을 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이 시에서 가을 외에 겨울과 봄도 얘기하면서, 함께 살아서 만나지 못하는 인연이 있다면 그 계절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푸르른 날에 맘껏 그리워하자고 외칩니다. 그래서 ‘푸르른 날’은 ‘여름’도 되고 ‘인생의 아름다운 시절’도 되고 ‘가을 하늘’도 된다고 풀이합니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단풍이 좋지 않아진 게 사실입니다. 멀리서 보면 감탄하지만, 가까이서는 셔터 버튼에 올린 손가락을 망설이게 하는 단풍이 몇 해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온에 잎이 타고 병충해에 긴 장마가 머물다 간 올해도 좋지 않은 단풍이 들었습니다. 고운 단풍이 못내 그리워집니다.

단풍에 관여하는 3대 자연조건은 기온, 일조량, 습도입니다. 기온이 낮아져 엽록소가 파괴되면서 단풍이 시작되고, 밤 기온도 적당히 낮아지면 당 성분이 축적되어 붉은색으로 발현됩니다. 일조량이 많아야 광합성이 활발해져 당 생산이 많아지며, 습도는 화려하고 깨끗한 단풍이 들게 합니다.

이를 좋은 단풍이 들기 위한 3대 조건으로 풀어 말한다면 적절하게 큰 일교차, 충분한 일조량, 풍부한 수분 유지라고 하겠습니다. 밤 기온이 5~7℃ 이하로 적당히 낮아지면 잎맥이 닫혀버려 광합성으로 생산한 당이 이동하지 않고 잎에 남아 있다가 안토시아닌으로 합성됩니다. 이때는 최저기온이 영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영하로 내려가면 잎이 상하면서 단풍색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교차가 무조건 큰 것보다 적절한 범위 안에서 큰 게 좋습니다. 일조량은 광합성과 관련 있으므로 충분하면 좋되 이것도 너무 많으면 오히려 해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풍부한 수분이 유지되어야 잎이 타는 현상과 병충해를 줄여주어 깨끗한 색감의 단풍이 만들어집니다. 실제로 수목원 내에서도 물가 주변의 나무일수록 고운 단풍이 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장산의 단풍
내장산의 단풍
요컨대, 일교차가 큰 내륙에 자리하고 계곡 낀 양지의 숲일수록 좋은 단풍이 듭니다. 설악산이나 내장산 등이 단풍 명소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말한다면, 개체 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사는 같은 종의 나무라 할지라도 어떤 건 빨리 물들고 어떤 건 늦게 물들며, 또 어떤 건 예쁘게 물들고 어떤 건 예쁘지 않게 물들어 보는 이를 갸우뚱거리게 만듭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듯 나무도 개체마다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비교적 깔끔한 물가의 단풍
비교적 깔끔한 물가의 단풍
단풍 다음은 낙엽이 순서입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처럼 아름다운 건 낙화뿐만이 아닙니다. 떨어질 때를 알고 떨어지면 낙엽이면 단풍이나 낙화 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운 퇴장은 영원한 퇴장이라기보다 순환의 고리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 모두가 순리에 따라 집행되는 것이므로 예외는 없습니다. 아름다운 끝에서 더 아름다운 끝으로 가는 일이므로 서러운 눈물일랑 두어 방울쯤만 흘리고 더 맑아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겠습니다.

관람객 풍경
관람객 풍경


광릉숲길의 낙엽
광릉숲길의 낙엽
이제 곧 겨울이 온다고 해서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김현승 시인의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이라는 시를 읽으면 되니까요. ‘적막한 몇 가지 일을 남기고 해는 졌습니다그려!’라든가 ‘어찌 회색의 포플러인들 오월의 무성을 회상하지 않겠습니까?’와 같은 표현이 메마른 입술로라도 읽어주기를 기다립니다. 계절이 깊어져 가는 수목원에 와서 시집을 읽는다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하는 생각을 이제야 해봅니다. 그리고 시는 죽었다고 외치는 분들께 고합니다. 그럼 시신이라도 찾아내 보시든가요! 국립수목원의 가을 입장은 예약이 필요하지만 광릉숲길은 시간만 내시면 됩니다. 어느 곳이 됐든 낭만적인 단풍이 드는 길 위에서 시집 한 권 들고 와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방역도 좋고 방콕도 좋지만, 그냥 보내기에 아까운 가을이 저기 가고 있는데 대체 어디서 뭣들 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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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혁 칼럼니스트는 식물분야 재야 최고수로 꼽힌다. 국립수목원에서 현장전문가로 일한다. ‘혁이삼촌’이라는 필명을 쓴다. 글에 쓴 사진도 그가 직접 찍었다. freebowl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