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적의 길'이란 책을 며칠 전 출장차 들렀던 동대구역 한 편의점에서 구매했다가 이틀 만에 다 읽어 버렸다. 축적의 길은 이정동 서울대학교 교수(공과대학) 저서로 2015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26명의 교수가 함께 출간한 '축적의 시간'이라는 책의 후속이다.

이 책에서는 외국과 비교해 짧은 기간동안 압축 성장한 한국의 최근 성장률이 떨어지는 이유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개념설계(Concept Design)'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개념설계는 제품 개념을 최초로 정의하는 것을 말한다.

책에서는 또 해외 글로벌 챔피온 기업이 그려준 밑그림을 최대한 빠르게 효율적으로 '실행(Implementation)'만 해온 기존 프레임으로는 더이상 성장하기 어렵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다양한 사례와 논리적인 분석으로 다루고 있다. 요즘 필자의 고민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정신없이 책을 읽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이정동 교수의 “축적의 길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이정동 교수의 “축적의 길
책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 초고층 빌딩을 지을 경우, 건축·토목·구조·풍동 설계 등과 같은 건설에 필요한 상세 분야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그 밑그림대로 구매·시공하는 실행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경우 초기 밑그림은 대개 글로벌 챔피온 기업이 담당한다. 그렇게 설계된 밑그림대로 한국 기업은 실행만 한다. 묻지 않아도 어느 쪽이 수익 구조가 좋을지 알 수 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당장 여러분이 사용하는 컴퓨터를 보자. 컴퓨터를 구동하는 운영체제(OS) 중 우리가 직접 밑그림을 그린 게 있던가? 컴퓨터 케이스를 열고 마더보드를 보면 우리가 직접 밑그림을 그린 부품이라곤 잘해야 메모리 카드나 하드디스크(혹은 SSD) 정도 뿐이다. 가장 중요한 CPU·마더보드는 모두 해외 글로벌 챔피언 제품 뿐이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4차 산업혁명에 단골로 등장하는 클라우드나 빅데이터, 인공지능 역시 해외에서 밑그림 그린 것을 우리는 가져다 쓰는 상황이다.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하는 카카오톡은 오픈소스소프트웨어(OSS)인 오픈스택(OpenStack)이란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기반으로 완성됐다. 오픈스택 표준을 이끄는 리더는 주로 해외 개발자다. 그뿐인가? 스마트폰 운영체제 점유율 1위인 안드로이드 역시 해외에서 나왔고, 안드로이드를 구성하는 리눅스나 자바(Java), XML 등 기술 역시 해외에서 나왔다.

해외 개발자가 유독 한국 개발자보다 뛰어나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축적의 길 저자인 이정동 교수는 이런 이유가 '축적의 시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그들이 개념설계 역량을 키워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도전적 과제를 오랜기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밑그림을 그려왔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국이란 변수가 등장했다. 중국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밑그림을 그릴만한 '축적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개념설계 역량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

책은 '공간의 힘'으로 설명했다. 남들보다 월등히 넓은 공간을 기반으로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축적에 걸리는 시간을 압축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 결과 2015년 샌프란시스코의 고속철 사업을 중국이 독자적인 밑그림으로 수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부러움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과연 우리에게 남은 자리가 있을까?

하드웨어를 개발하다 보면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이 커넥터로, 하드웨어 개발 일정을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된다. 부품과 부품 혹은 보드와 보드를 연결할 때 사용하는 커넥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제품 컨셉과 성능이 달라질 수 있다. 커넥터를 다양하게 알면 알수록 다양한 콘셉트의 제품 구상이 가능하다. 당연히 개발 기간 역시 매우 짧아진다. 하드웨어 개발에서 커넥터만큼 중요한 요소도 없다.

그렇게 중요한 커넥터는 대부분 한국에서 개발하지 않는다. 유럽과 미국, 일본이 이 시장을 선점했다. 요즘엔 중국에서 자체 개발한 커넥터가 성능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가격은 말할 것도 없다.

어찌보면 하드웨어 제품 개발에서 도전적인 시행착오를 축적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부품이 바로 커넥터다. 커넥터를 다양하게 접하지 못하는 한 다양한 제품이 나올 수 없단 얘기다. 이는 곧 제품의 차별화 된 경쟁력으로 나타난다.

필자는 6월 말 '다시 하드웨어다!'라는 칼럼에서 소프트웨어 기업으로만 알고 있던 페이스북이나 네이버 등이 하드웨어에 투자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해당 칼럼은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빅데이터 등 신 산업의 부상과 갈수록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등한시했던 하드웨어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취지였다.

그당시 진짜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라도 하드웨어를 경험해보는 게 좋다는 것이다. 실제 소프트웨어 개발자였던 필자 역시 하드웨어를 만나게 되면서 기존에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소프트웨어의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생각의 범위가 넓어지고 종류가 다양해졌다. 이는 십년 이상 강의장에서 만난 다양한 분야의 현업 개발자와 학생에게 필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유난히 학구열로 유명한 한국이기에 벌써 몇 백만원짜리 코딩 학원이 대치동에 나타났다. 영어교육으로 유명한 모 기업에서 코딩 교육 기업에 투자했다는 얘기 역시 심심찮게 들린다. 아이들 코딩 교육용 드론이나 로봇을 만든다는 기업도 심심찮게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 스크래치(Scratch)라는 툴을 기반으로 천편일률적으로 제공되는 예제들을 돌려보는 수준이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밑그림을 그리는 시행착오가 아니라는 점에서 걱정이 앞선다.

프레임을 바꿔야 한다. 효율만 앞세우는 기존 실행 문화에서 다소 느리고 실패를 하더라도 그렇게 쌓인 시행착오에서 남과 다른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개념설계 역량을 쌓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혼자 바꿀 수 없다. 정부와 기업, 학교에서 바뀌지 않으면 성장, 아니 생존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대기업은 쉽게 수익을 낼 수 있는 아이템보다는 이미 확보한 수 많은 인재를 활용해 축적의 시간을 줄일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작은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 스타트업은 보유 자원을 한탄하기 전에 가지고 있는 자원만으로 시도할 수 있는 도전 과제를 찾아야 한다. 다만 자원의 한계를 고려해 작은 아이디어부터 시도해야 하며, 도전을 멈춰서는 안된다.

어렸을 때 들었던 지구촌이란 말을 요즘처럼 실감한 때가 없다. 토머스 프리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라는 책을 보면 세계화로 인해 평평해진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결코 평범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세스 고딘의 '보랏빛 소가 온다'라는 책도 안전한 제품이 아닌 세상에 없던 '보랏빛 소'(Remarkable)로 승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현재까지 어떤 시간들을 축적하고 있었는가? 어제와 같은 오늘이란 시간을 축적하면서 오늘과 다른 내일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도전적 시행착오를 즐기는 문화, 사회적인 구조만이 평평해진 세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명환 엑세스 연구소장(CTO)은 충남대에서 정보통신학을 전공하고 한이음 IT멘토, 미래창조과학부 소프트웨어 마에스트로 멘토, 오픈스택 한국 커뮤니티 네트워크 분과장, 정부통합전산센터 클라우드 기술위원,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산학협력 멘토, 네이버 D2 Startup Factory 기술 파트너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는 국내 최초로 데이터센터용 ARM 서버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뻔뻔하게 배우는 임베디드 리눅스'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