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LG전자가 미국 보호무역주의 대응의 일환으로 6억3000만달러(7200억원)에 달하는 현지 세탁기공장 투자에 나섰지만 '무용지물'이 될 판이다. 미국이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를 발동할 경우 현지 투자가 보호무역의 방패가 될 수 없다는 선례가 남겨질 수 있어 업계의 관심이 쏠린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삼성·LG전자 등이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가정용 대형 세탁기가 자국 산업에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고 5일(현지시각) 발표했다. 공청회, 투표, 트럼프 대통령 최종 결정 등 과정을 거쳐 2018년 초 결론이 나올 전망이다.

 미국 뉴저지 로우스(Lowe's) 매장에 전시된 삼성 드럼세탁기. /삼성전자 제공
미국 뉴저지 로우스(Lowe's) 매장에 전시된 삼성 드럼세탁기. /삼성전자 제공
세이프가드는 특정 품목 수입이 급증해 국내 제조업체에 피해가 발생하면 수입국이 관세를 높이거나 수입을 제한하는 등 자국 기업에 도움을 주는 조치다. 반덤핑 조사와 달리 외국 업체가 덤핑 등 불법 행위를 하지 않아도 수입을 제한할 수 있다.

◆ 美 정부 등에 업은 월풀, 세이프가드 범위 확대 요구

삼성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州) 뉴베리 카운티에 3억8000만달러(4350억원)를 투자해 가전 공장을 설립하고, 2018년 초부터 세탁기를 현지 생산해 미국 시장 수요에 대응한다. 고용 규모는 950명쯤이다.

LG전자는 2월 말 대지면적 125만㎡(건물 연면적 7만7000㎡) 규모의 세탁기 공장을 짓기 위해 테네시주와 2019년 1분기까지 2억5000만달러(2860억원)를 투자하는 협약을 맺었다. 고용 규모는 600명이다.

가전업계는 이를 계기로 경쟁사인 월풀이 줄곧 공격의 근거로 삼은 반덤핑 등 통상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월풀은 오히려 모터 등 핵심 부품을 해외에서 생산해 미국 공장에서 조립하는 경우도 세이프가드 범위에 포함해야 한다고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가전업계는 미 정부가 월풀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삼성·LG전자의 투자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삼성·LG전자는 한국·중국·태국·베트남·멕시코 등에서 세탁기를 생산해 미국에 수출 중이다. 양사가 2016년 미국 시장에 수출한 대형 가정용 세탁기 매출은 10억달러(1조1400억원)에 달한다. ITC는 삼성·LG전자가 미국에 수출하는 세탁기 중 '한국산' 제품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향후 세이프가드 조치에서 배제된다.

전자 업계에서는 미국 수출용 세탁기는 대부분 태국·베트남 등 해외 공장에서 제조 및 수출되고 있어 FTA 수혜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평가한다.

◆ 세이프가드 발동 시 美 공장 건설 및 가동 저해 우려

삼성전자는 5일 ITC의 결정 직후 뉴스룸을 통해 "실망스러운 결과다"며 "세탁기 수입 금지는 선택권 제한, 가격 상승, 혁신 제품 공급 제한으로 이어져 미국 소비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 "ITC는 향후 나올 구제 조치가 가전공장 건설과 가동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LG전자 측도 "월풀이 세이프가드를 요청한 것은 미국 소비자를 외면하는 자구책이다"라며 "미국 정부는 자국민의 선택권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가전업체 월풀은 5월 양사가 반덤핑 관세 회피를 위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세탁기의 생산 공장을 중국 등으로 이전했다며 세이프가드를 요청한 바 있다.

가전업계는 삼성·LG전자의 미국 세탁기 공장 건설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가전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LG전자가 추진 중인 미국 현지 가전공장 건설이 지연될 우려가 있다"며 "국내 가전업계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기 전에 미국 정부와 절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2016년 삼성전자가 인수한 미국 빌트인 가전 브랜드 데이코와 시너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