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블록체인 현장] ⑥'자유의 도시' 베를린, 블록체인 성지로 급부상...투자금 '블랙홀'

입력 2018.07.09 06:00

유럽 대륙이 블록체인 바람으로 꿈틀대고 있다. 블록체인을 정치·경제·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각 분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동력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유럽 각국의 행보는 가상화폐 가격 등락에 울고웃는 한·중·일 지역의 한탕주의 흐름이나 묻지마 투자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새 기술 패러다임으로 ‘골디락스(Goldilocks·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적인 경제 상황)’ 시대를 준비하는 유럽의 블록체인 혁신 현장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상하이, 샌프란시스코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우리가 하는 일을 문화적으로 제대로 이해하는 곳은 베를린이 유일했습니다.”

베를린 시 전경 /위키커먼스 = Harald Helmlechner.
지난 6월 29일(현지 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만난 마인하르트 벤(Meinhard Benn) 사토시페이(SatoshiPay) CEO는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맥주를 비트코인으로 사 먹을 수 있었던 곳이 바로 베를린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사토시페이는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1센트와 같이 아주 적은 금액을 지불하는 수단을 개발 중이다. 이 회사는 투자 유치를 목적으로 본사를 런던에 두고 있지만, 핵심 개발팀과 영업팀은 베를린에서 운영하고 있다.

베를린의 핀테크 기업 솔라리스방크(Solaris Bank)는 블록체인 기업에 계좌를 개설해 주겠다고 6월 28일 발표했다. 솔라리스방크는 2016년 설립된 스타트업이지만, 정식 은행 면허를 취득한 곳이다. 유럽 대부분의 은행이 블록체인 기업의 계좌 개설을 꺼리는 가운데, 솔라리스 방크가 공격적인 영업에 나선 것이다. 솔라리스방크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European Economic Area)의 블록체인 기업 계좌 개설을 제공할 계획이다. 솔라리스방크 측은 “법정 화폐(Fiat Currencies)로 암호화폐를 손쉽게 사고팔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유럽 블록체인의 수도(首都)로 급부상하고 있다. 베를린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이다. 베를린 스타트업들은 ICO(가상·암호화폐공개)를 통해 투자금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 IOTA 등 유명 스타트업 근거지

독일 블록체인연방협회에 따르면, 현재 독일에는 110개가 넘는 블록체인 스타트업이 있다. 이중 62개(56%)가 베를린에 있다. 뮌헨과 프랑크푸르트(각 11개)보다 5배 이상 많은 숫자다. 지금까지 독일 57개 스타트업이 ICO를 통해 20억 유로가 넘는 자금을 조달했는데, ICO에 성공한 독일 스타트업 중 55%도 베를린에 있다.

베를린의 유명 블록체인 스타트업으로는 아이오타(IOTA), 리스크(Lisk), 사토시페이, 슬록잇(Slock.it), 패리티(Parity), 지노시스(Gnosis), 비트왈라(Bitwala) 등이 꼽힌다. 아이오타는 사물인터넷(IoT)과 유사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물 간 거래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폭스바겐, 도이치텔레콤, 마이크로소프트, 보쉬 등 독일 대기업과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호재 때문에 IOTA는 전 세계 암호화폐 시가총액 순위 10위 안에 들었다.

마인하르트 벤(Meinhard Benn) 사토시페이(SatoshiPay) CEO가 베를린이 왜 좋은 창업 장소인지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도 6개월 근무한 적이 있다며 ‘I 💗 Korea’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인터뷰에 응했다. /류현정 기자
사토시페이는 독일 최대 미디어 그룹 악셀 스프링어의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에 참여해, 회원 가입이나 계좌 등록 등 복잡한 절차 없이도 원클릭으로 소액 결제가 가능한 솔루션을 선보였다. 유럽에는 온라인·모바일 광고를 아예 차단하는 애드블록(AdBlock) 프로그램이 크게 유행해 유럽 미디어 기업들은 광고가 아닌 콘텐츠 유료화로 매출을 올리는 방법을 찾고 있다. 악셀 스프링어 그룹도 사토시페이를 이용해 기사 건당 결제하는 방법을 검토 중이다.

패리티는 이더리움의 소스 코드를 이용해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이 ‘빌딩 블록스(Building Blocks)’라는 프라이빗 블록체인 시스템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줬다. WFP는 2017년 초부터 요르단 난민 수용소에 있는 시리아 난민에게 빌딩 블록스를 이용해 식비 등을 제공한다. 난민들이 빌딩 블록스에 가족 계좌를 개설하면, WFP로부터 식비를 받을 수 있다. 그동안 WFP는 비싼 해외 송금 수수료 때문에 난민들에게 식비를 제공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이체 수수료를 98%나 줄였다.

◇ 베를린의 톱 클래스 개발자, ‘비트네이션’ 독일을 만든다

이더리움은 ‘스마트 계약’ 기능을 추가한 2세대 암호화폐 시대를 연 것으로 평가받는다. 2014년 자금 조달에 성공한 이더리움은 현재 비트코인에 이어 암호화폐 시가총액 2위를 기록하고 있다. 플로리안 그라츠(Florian Glatz) 독일 블록체인연방협회(Blockchain Bundesverband) 회장은 “이더리움이 실질적으로 탄생한 곳이 바로 베를린”이라고 주장했다.

스마트 계약이라는 아이디어를 낸 것은 캐나다에서 태어난 러시아인 비탈릭 부테린이지만, 제대로 된 블록체인 플랫폼으로 발전시킨 것은 베를린 개발자들이었다는 게 그라츠 회장의 설명이다. 가빈 우드 이더리움 공동 개발자도 “베를린 팀이 이더리움 개발 작업의 대부분을 해냈다"고 말한 바 있다.

6월 29일 플로리안 그라츠(Florian Glatz) 독일 블록체인연방협회(Blockchain Bundesverband) 회장은 독일이 ‘비트네이션'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라츠의 발표 자료 / 류현정 기자
실제로 베를린에는 수년에 걸쳐 세계 최고 수준의 코딩 커뮤니티가 성장하고 있다. 런던이나 암스테르담에 본사를 둔 기업들도 실제 코딩 작업은 베를린 개발자들에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라츠 회장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블록체인 생태계가 만들어지면서 독일이 ‘비트네이션(Bitnation, 암호화폐 강국)’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협회에 따르면, 독일은 전 세계 비트코인 채굴 서버(노드)의 18.34%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이더(이더리움의 화폐 단위)를 4번째로 많이 쓰는 나라로 꼽힌다. 독일의 가상화폐 거래소 비트코인.데에(bitcoin.de)는 정부가 허락한 세계 최초의 가상화폐 거래소이다.

독일 연방 정부는 ‘독일 디지털화(Germany Digitalization)’ 정책의 일환으로 2017년 총 7개의 디지털 허브를 선정했다. 베를린은 독일 주요 도시와 경쟁해 ‘사물인터넷’과 ‘핀테크’ 분야의 허브로 선정됐다.

◇ 무정부주의 전통에 값싼 물가 덕분...창업자 43%는 외국인

베를린이 독일을 넘어 유럽의 블록체인 성지로 거듭나는 이유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전통이 깊은 데다 임대료 등 각종 물가가 세계 여러 대도시와 비교해 크게 저렴하기 때문이다. 이민자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도 창업 열풍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100년 전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세계 곳곳의 무정부주의자들이 공화국 수도인 베를린에 모여들었다. 1980년대 거리 예술가를 중심으로 빈 건물을 무단으로 점거하는 스쾃(squat) 운동도 일기 시작한 곳도 베를린이다. 동베를린 거주자들이 서베를린으로 대거 이주함에 따라 동베를린에 빈 건물이 늘어난 탓이다. 무차별적 감시와 테러로 악명이 높았던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를 경험한 베를린 시민들은 사생활 보호에 대한 집착도 강하다.

특히, 베를린 장벽 인근이었던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일대에는 무정부주의자, 건물 무단 점거자와 성소수자·펑크족·보헤미안족 등 대항문화 추종자들이 많이 거주했다. 이들은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 비트코인을 지지하는 주요 세력이 됐다. 세계 최초로 비트코인 오프라인 결제를 시작한 주점 ‘룸77’도 크로이츠베르크에 있다.

베를린에 위치한 한 창업 카페 전경 /류현정 기자
이런 분위기에 창업 열풍이 맞물리면서 베를린은 블록체인의 성지로 급부상했다. 베를린은 2017년 기준 테크 스타트업이 2400여 개나 될 정도로 스타트업에 관한 한 독일 내 독보적인 입지를 자랑하고 있다.

베를린의 면적은 서울의 1.5배이지만, 산이 없는 특성 때문에 가용 면적이 서울의 2.5배에 달한다. 여기에다 동베를린이 개발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안정세를 유지했고 창업가들이 부담없이 사무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베를린 시민의 30%가 이민자이며, 스타트업 창업자의 43%가 외국인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뒤를 이어 외국인 창업자 비율이 두 번째로 높다. 외국인 창업자의 비자 발급률도 77%에 달한다.

다만,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이후 베를린에 창업자들이 몰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최근 베를린 부동산 가격이 급격히 오르고 있다. 2017년 독일 부동산 가격은 30년 이래 최고 강세를 보였고 특히 베를린의 부동산 가격은 1년 만에 20% 이상 뛰었다. 2018년 7월 현재 ‘베를린은 공사판’이라고 부를 정도로 곳곳에 신축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18 KPF 디플로마-블록체인 과정에 참여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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