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블록체인 현장] ⑩'세금 내지 않는 국가'...에스트코인, 담대한 구상의 운명은?

입력 2018.07.18 06:00

유럽 대륙이 블록체인 바람으로 꿈틀대고 있다. 블록체인을 정치·경제·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각 분야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동력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유럽 각국의 행보는 가상화폐 가격 등락에 울고웃는 한·중·일 지역의 한탕주의 흐름이나 묻지마 투자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새 기술 패러다임으로 ‘골디락스(Goldilocks·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상적인 경제 상황)’ 시대를 준비하는 유럽의 블록체인 혁신 현장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인구 130만명의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Tallin)은 발트해 핀란드만 연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다. 1260년대 세운 거대한 성벽과 교회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13세기 융성했던 해상 무역의 흔적들이다.

에스토니아 탈린의 구 시가지 모습
구시가(舊市街)에서 자동차로 불과 10분 거리에는 ’디지털 네이션’를 진두지휘하는 에스토니아 정부 청사가 있다. 여기서 또 남동쪽으로 5분 정도 달리면 전 세계인에게 에스토니아의 ‘전자영주권(e-residency)’을 발급해주는 e-레지던시 사무실이 나온다.

“앞으로 ‘에스트코인(estcoin)’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7월 3일(현지 시간) 오전 11시 심 시쿠트(Siim Sikkut) 에스토니아 정부 최고정보책임자(CIO, 경제통신부 사무차장)를 만났을 때, 같은 날 오후 2시 카스파르 코르유스(Kaspar Korjus) 에스토니아 전자영주권 총괄 국장을 만났을 때, 기자는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지난해 말 에스토니아 정부는 에스트코인(가칭)이라는 암호화폐 발행 계획을 밝혔다가 유럽중앙은행(ECB)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는 “어떤 유럽연합(EU) 회원국도 자국 통화를 도입할 수 없다”는 원칙을 강조하며 공개적으로 에스토니아의 행보를 비판했다. 에스토니아는 2004년 EU에 가입했다.

시쿠트 CIO와 코르유스 국장 모두 ECB의 반발을 의식한 듯 기자의 질문에 말을 아꼈다. 시쿠트 CIO는 “우리는 에스트코인을 ‘화폐(currency)’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코르유스는 “질문에 대답하기 힘들다”며 “나중에 이메일로 물어봐라”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에스토니아의 전자영주권 사업을 설명하면서 에스트코인 발행을 염두에 두는 발언을 여러차례 했다. 시쿠트 CIO는 “9월쯤이면, 에스트코인의 발행 시점 등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코르유스 국장은 “ECB가 에스트코인이 유로를 대체한다고 잘못 생각한 것 같다”면서 “에스트코인은 ‘로그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등 일종의 정보기술(IT)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 에스토니아가 검토한 3가지 형태의 코인

심 시쿠트(Siim Sikkut) 에스토니아 정부 최고정보책임자(CIO)는 “전자영주권 프로그램을 통해 에스토니아에 많은 기업을 유치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류현정 기자
현재 135개국 약 3만8000명 이상이 에스토니아의 전자영주권을 발급받았다. 전자영주권이 있으면, 에스토니아 정부의 각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유럽연합(EU) 지역에서 사업도 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전자영주권자들이 서로 교류하고 각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 플랫폼 ‘e-레지던시'도 만들고 있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3가지 형태의 암호화폐 발행을 검토했다. 첫 번째는 ‘커뮤니티 에스트코인(community estcoin)'이다. 커뮤니티 코인은 ‘e-레지던시’를 활성화하는 인센티브로 쓰일 수 있다. 가령, e-레지던시의 방문자수를 크게 늘리거나 유용한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에게 커뮤니티 토큰을 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아이덴티티 에스트코인(identity estcoin)’이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전 국민에게 디지털 신분증인 ID카드를 발급하고 있다. 전자영주권자들도 이 카드를 받는다. 정부가 ID카드마다 일정량의 코인을 제공해 주면, 영주권자들은 각종 서류 발급과 정부의 부대 서비스 이용에 실제 돈을 쓸 필요가 없다. 아이덴티티 코인으로 해결하면 된다. 만약 영주권자가 위법 행위를 하면, ID카드에 제공한 토큰을 도로 회수하는 페널티를 부과할 수 있다. 아이덴티티 코인을 통해 영주권자의 거래 내역을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에스토니아 정부의 시각이다.

세 번째는 유로화에 가격을 고정한 ‘유로 에스트코인’이다. 암호화폐의 ‘탈중앙화' 이점과 법정화폐의 ‘안정성'과 ‘신뢰’를 더한 것이다. 유료화와 똑같은 가치를 지니면서도 코인을 주고받는 데 비용이 들지 않도록 설계한다는 것이 에스토니아 정부의 계산이었다.

유로 코인은 ECB의 반발을 불러왔다. EU 회원국인 에스토니아가 유로를 쓰지 않고 자체 화폐를 발행하려 한다는 것이다. EU의 경고를 받은 에스토니아 공보 당국은 “에스토니아는 자체 암호화폐 발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논란 진화에 나섰다. 공보 관계자는 “에스트코인은 ‘e-레지던시' ID 프로그램용으로만 쓰일 가능성이 일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 “세금 내지 않는 국가 만들 수 있다”

카스파르 코르유스(Kaspar Korjus) 에스토니아 전자영주권 총괄 국장은 “기술의 발달로 국가라는 기본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면서 “국가가 암호화폐를 공개해 자금을 조달하고 시민들은 세금을 내지 않는 세상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류현정 기자
에스토니아가 암호화폐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뭘까. 바로 에스토니아의 국가 발전 전략에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1991년 구 소련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에스토니아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000달러 수준인 임업 국가였다. 독립 이후 에스토니아는 소프트웨어 인력을 집중 양성하며 IT산업을 발전시켰고 국가 시스템을 디지털화하며 경제 효율을 꾀했다.

에스토니아는 세계 최초로 2000년 인터넷 접속권을 기본 인권으로 선언하는가 하면, 곧이어 ID카드의 디지털 서명을 필기 서명과 동일한 효력으로 인정하는 법도 제정했다. ID카드 하나로 거의 모든 행정을 처리하는 디지털 신분증 사업이 크게 성공했다.

자신감을 얻은 에스토니아 정부는 국경이 사라진 디지털 세계를 향한 담대한 국가 구상에 나선다. 바로 전 세계 시민에게 전자영주권을 주는 e-레지던시 사업이다. 2014년 시작했다. 에스토니아는 자국 내 기업을 유치하는 데 e-레지던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에스토니아는 e-레지던시를 ‘디지털 국가(digital nation)’라고 부른다. 에스트코인은 이 디지털 국가의 발전을 지원하고 자본을 끌어들이는 중요한 매개체다.

시쿠트 CIO는 “EU 국가는 화폐를 발행할 수 없다. 우리는 토론을 거듭해 ‘화폐’가 아니라 ‘토큰'에 집중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e-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더 많은 기업이 에스토니아에서 사업을 하기를 원한다"면서 “e-레지던시에 속한 사람들은 각종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에스트코인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코르유스 국장의 구상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 그는 향후 100년간 기술의 발달로 국가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본다. 디지털화의 흉내만 내는 ‘가짜 디지털 국가’에서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 결혼과 이혼 같은 행정 절차도 처리하는 ‘클라우드 국가’로 진화하고 이후 ‘토큰화'와 ‘AI’의 과정을 거쳐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영토, 시민, 서비스, 재산 개념을 가진 국가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코르유스 국장은 “토큰화를 통해 세금 납부를 없앨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업이 IPO(주식공개)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처럼, 국가도 ICO(암호화폐공개)를 통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면서 “국가가 발전하면, 해당 국가 코인도 오르게 돼 국가와 시민이 서로 이득을 본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2018 KPF 디플로마-블록체인 과정에 참여 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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