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세계는 ‘뭐가 있지?’를 묻는 정보의 시대에서 ‘어디 가지?’ ‘뭐 먹지?’를 묻는 관심의 시대를 지나 ‘뭐 하지?’를 묻는 경험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디지털과 인터넷이 휩쓴 3차산업혁명의 변화를 지나 이제는 거꾸로 현실세계가 신세계가 되는 융복합 경험산업의 4차산업혁명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 시리즈 ‘퍼펙트스톰 - 경험을 파는 회사들’은 도래한 경험산업의 시대를 조명하고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는 혁신기업을 소개하고 그들의 뉴비즈니스모델을 분석할 예정이다. 시리즈 기획물의 첫 번째 칼럼은 방탈출 게임을 처음 상업화한 ‘스크랩(SCRAP)’이다. 스크랩은 일본 최대 규모의 현실체험형 게임을 전개하고 있다.

◇ 신주쿠의 대표적인 현실게임공간 TMC

1월 초의 도쿄 신주쿠 가부키초 지역. 일본의 대표 유동인구 밀집지역인 이곳은 작년에 이어 쌀쌀해진 겨울 날씨로 부쩍 유동인구가 줄어든 상태였다. 그러나 유독 6층 높이의 ‘도쿄 미스테리 서커스(Tokyo Mystery Circus, TMC)’ 인근에는 수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만나기로 한 일본 최대 규모의 현실체험형 게임을 만드는 ‘스크랩(SCRAP)’이라는 회사의 건물이다.

스크랩은 한국에서는 방탈출 게임으로 유명한 현실체험형 퍼즐 게임을 최초로 상업화한 회사다. 2008년에 설립, 인간이 가진 문제해결본능을 주목해 처음에는 무료 신문의 십자말 퍼즐을 만드는 일로 사업을 했으나 이색이벤트로 현실 공간에서 경험할 수 있는 탈출방식의 리얼게임을 만들었던 것이 화제를 모으면서 본격 성장궤도에 들어섰다.

스크랩은 밀실을 탈출하는 룸(Room) 타입 게임부터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며 문제를 해결하는 홀(Hall) 타입, 그리고 도심을 누비며 보물찾기를 하듯 문제를 풀어가는 필드(Field) 타입 세 가지 형태의 게임을 제공하고 있다. 이 게임은 역대 참가자가 수십만이 넘을 정도로 일본의 대표적인 경험 프로그램으로 자리잡고 있고 많은 외국인까지 참여하는 대표적인 관광경험 프로그램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한국에서 방탈출 게임이라고 불리는 게임들은 스크랩의 룸 타입 게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번 스크랩과 만남은 한일 양국을 대표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현실경험 게임을 만드는 기업간의 상견례로, 도래하는 경험산업의 선두주자로서 협력의 틀을 만들어 공동의 사업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스크랩은 면담에 앞서 그들의 비즈니스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도록 TMC 건물의 주요 게임을 경험할 수 있도록 편의를 마련해 줬다. 건물에 도착하니 그들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건물로 들어서자 발 디딜 틈이 없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들로 가득 찼고 손에는 각자 구매한 게임 키트를 들고 문제를 해결하느라 여념이 없다. 주로 20, 30대의 젊은이들이 많았지만, 어린이와 부모, 외국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사람들로 가득찬 TMC 내부. / 송인혁
사람들로 가득찬 TMC 내부. / 송인혁
◇ 흐름에서 비즈니스 기회를 찾다

건물의 1층과 2층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상황을 모르면 어떤 공연에 입장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처럼 보였겠지만 이들은 멈춰있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인파의 밀도에 서로 스트레스를 받을 법도 하지만 마치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 듯 자신의 문제해결에 몰두하고 있는 장면들은 장관이었다.

건물 내뿐만이 아니었다. 건물을 빠져나가서 올라가는 비상구의 양쪽 계단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마치 방문자 입장에서 이 광경은 일본 여행 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돈키호테 디스카운트 스토어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들은 생필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구매해서 체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경험을 하기 위해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 상황은 찾아볼 수가 없다. 잠깐을 봐도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들이 입장했고 게임을 끝낸 사람들이 빠져나가며 흐름을 만들고 있었는데 어림잡아도 시간당 백명에서 이백명 정도가 유입되는 모습이었다. 이는 경험산업의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 모델 중의 하나다.

줄을 서는 순간 기업의 관점에서는 매출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다. 흔히 입소문을 타면서 유명해진 맛집멋집의 대기줄을 보며 대박가게라고 부러워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사실은 매출의 누수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싶으면 사람들은 발걸음을 돌리기 때문이다. 스크랩은 유동모델을 고려했고, 경험의 진입도를 높여 사람들이 계속해서 유입될 수 있도록 게임의 난이도와 흐름의 강약을 세심하게 설계했다. 물론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은 이런 논의가 웃플 수 밖에 없지만 말이다.

◇ 수십종의 게임, 스포일러 프리

게임 키트는 상시적으로 15종류 정도를 구매할 수 있고, 시즌별로 특별히 마련되는 게임도 다수 있었다. 가격은 만원부터 삼만원 정도까지 다양했는데, 30분 이내로 실내 공간의 지형지물에 숨겨진 퍼즐을 풀어가며 즐기는 종류부터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하지 싶을 만큼 창의적인 문제해결요소와 게임키트의 완성도를 즐길 수 있는 고퀄 종류는 물론 건물 바깥을 나가서 인근의 도심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야외형 게임까지 다양했다. 흔히들 이용자가 많으면 답안유출의 위험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지만, 이곳은 심지어 연도별 게임의 기출문제집도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었다.


2층 한쪽 벽면 전체가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우편함들로 가득하다. 실내의 모든 구조물들과 소품들이 문제를 풀어가는 단서가 되고 예사로운 것은 단 하나도 없다. / 송인혁
2층 한쪽 벽면 전체가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우편함들로 가득하다. 실내의 모든 구조물들과 소품들이 문제를 풀어가는 단서가 되고 예사로운 것은 단 하나도 없다. / 송인혁
반면 이렇게 1층과 2층은 앞서 언급한 돌아다니며 탐색하는 방식의 유동형을 경험할 수 있다면, 3층과 4층에는 프로젝션 매핑 방식으로 신기한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테이블 게임들이나 특수공간에 잠입해 탈출하는 종류의 게임들이 준비되어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밀실탈출 게임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차이점은 한국은 한 공간에 최대 4명 정도가 들어가는 형태의 게임이 일반적이지만 스크랩은 40~50명 정도가 분리된 형태로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단위당 매출이 10배가 넘는다.

게임 특성상 이 게임들은 시간제로 운영하고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티켓을 결제하는 방식으로 구매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티켓 구매 후 대기 시간이 있으면 다시 1, 2층의 유동형 게임을 결제해서 즐기다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3, 4층의 게임은 티켓팅을 해서 예약을 하는 방식이다.

프로젝션 기술을 사용하는 ‘어느 마법도서관의 기묘한 도감’ 게임. 테이블당 6명까지 참여할 수 있고 50여명 정도가 동시에 체험이 가능하다. / 송인혁
프로젝션 기술을 사용하는 ‘어느 마법도서관의 기묘한 도감’ 게임. 테이블당 6명까지 참여할 수 있고 50여명 정도가 동시에 체험이 가능하다. / 송인혁
메탈기어솔리드 게임. 군사시설에 잠입해서 비밀병기를 찾는다는 설정. 3명이 한 팀을 이루어 진행한다. / TMC 홈페이지
메탈기어솔리드 게임. 군사시설에 잠입해서 비밀병기를 찾는다는 설정. 3명이 한 팀을 이루어 진행한다. / TMC 홈페이지
마법 도감이라고 불리는 프로젝션 방식의 게임 하나만 놓더라도 계산해보니 연간 20억원의 매출이 발생하고 전체 게임수와 참여자를 보수적으로 잡아도 TMC에서 발생하는 매출은 연간 100억은 넘지 않을까 추정된다. 실제로 스크랩의 공식 정보로는 2016년도 매출이 이미 200억을 넘었다. 다음 기사로 소개할 도심타입의 게임까지 감안하면 실제 매출은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짐작된다.

반다이 남코 VR Zone 신주쿠. / 반다이 남코 홈페이지 갈무리
반다이 남코 VR Zone 신주쿠. / 반다이 남코 홈페이지 갈무리
◇ 줄 서는 것들의 운명

아이러니하게도 TMC 건물의 맞은편에는 비디오 게임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기업 반다이 남코사의 일본 최대 규모 ‘VR 존 신주쿠’가 자리하고 있다. 그 외관의 크기만으로도 압도당할 만큼 초대형 크기의 경험 공간으로 개관때부터 화제를 모았던 가상현실 경험공간이다.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VR 공간도 흥미로운 지점이다보니 바로 이곳을 방문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자 그 위용과는 달리 내부는 한산했고, 기본적으로 입장을 위해서는 한 개 이상의 게임을 구매해야 출입할 수 있다. 비용은 최소 3만5000원이고, 재미있어 보인다 싶은 게임은 역시나 기본 한시간의 대기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은 게임들은 한산했다.

남의 사정을 걱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아이고 이 큰 공간을 어떻게 운영하지…’ 하는 수지타산을 걱정할 정도로 매출이 좋아 보이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몇달 뒤 이곳은 고속버스터미널로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스크랩 측에선 유동인구가 훨씬 늘어날 것으로 대단히 반기고 있었는데 건물을 마주하고 있는 이 두 회사의 모습은 이후에도 소개할 경험패러다임의 변화의 상징으로 보였다. 줄 서는 것들의 운명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제는 줄 세우고 축적하는 모델에서 흐름을 만들어내는 모델이, 수렴시키는 스팟성 경험 대신 확산시키고 과정을 즐기게 만드는 선형 경험이 선택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다음 기고에서는 도쿄 시내 전체를 게임공간으로 풀어가는 세계적인 규모의 필드타입 게임 도쿄메트로언더그라운드미스테리를 소개하고, 현실 공간 자체를 비즈니스 모델로 접근하는 아이디어를 분석하고자 한다. 또한 스크랩사와의 만남을 통해 그들이 보는 경험산업의 비전을 전할 예정이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송인혁 유니크굿컴퍼니 대표는 혁신사상가이며, 스토리텔러로 융복합스토리경험 플랫폼 리얼월드를 개발했다.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와 TED 지역이벤트 외 주요 강연 프로그램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KAIST에서 전산학을 전공했으며,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및 기획 일을 했다. ‘유니크굿’, ‘퍼펙트스톰’ 외 다수의 저서를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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