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많은 회사가 회의를 진행하며 화이트보드에 내용을 적고 포스트잇을 여기저기 붙인다. 오프라인 회의를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의견을 수렴하려면 상대를 직접 보고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한다. 카카오톡이나 구글 행아웃 이용 등 다양한 원격회의 도구가 있지만 현장감 있는 원격 회의까지 갈 길이 멀다. 증강현실(AR) 기술을 접목하면 어떨까.

2일 경기도 판교 네이버 본사에서는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2019’ 행사가 열렸다. 네이버가 후원하고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주최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하거나 혁신을 이룬 스타트업을 이끈 이들이 모여 경험을 공유한 자리다.

이진하 스페이셜 CPO(Chief Privacy Officer)가 관심을 모았다. 스페이셜은 2010년 이민하 CPO와 아난드 아가라왈라 대표가 함께 창업한 증강현실(AR) 솔루션 스타트업이다.

이 CPO는 "여전히 각 기업이 집단지성을 활용할 땐 컴퓨터 스크린 밖에서 회의를 진행한다"며 "세계 곳곳에 흩어진 전문가나 팀원이 물리적 한계로 묶여있어 협업이 어렵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제품으로 사람들이 언제 어디에 있든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생산성 높은 협업을 하도록 돕는게 회사 비전"이라고 소개했다.

스페이셜 솔루션은 물리적 공간 제약을 뛰어넘어 여러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한 공간에 있는 것 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한다. 심지어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문서를 가상현실 공간에 띄워놓고 동시에 볼 수 있다. 마치 마블 영화 ‘아이언맨’이 회의 중 각종 데이터를 눈 앞 허공에 띄워놓고 다른 어벤저스 멤버들과 공유하는 장면과 유사하다.

이진하 스페이셜 CPO가 2일 경기도 성남 네이버에서 열린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2019’ 행사에서 발표를 하는 모습. / IT조선
이진하 스페이셜 CPO가 2일 경기도 성남 네이버에서 열린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2019’ 행사에서 발표를 하는 모습. / IT조선
스페이셜 솔루션은 AR 헤드셋이나 홀로렌즈로 이용할 수 있다. 홀로렌즈는 마이크로소프트(MS)가 2016년 출시한 혼합현실 기반 웨어러블 기기다. MS는 지난 2월 홀로렌즈2를 출시했다. 스페이셜은 홀로렌즈2를 이용한 증강협업 플랫폼을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MWC(Mobile World Congress)에서 직접 시연해보이며 화제를 모았다. 사티아 나델라 MS 대표가 직접 스페이셜 솔루션을 구동해보였다.

스페이셜 솔루션은 특히 가상공간 내 움직임을 홀로그램으로 생성하되, 물체가 부딪힐 때 내는 물리적인 특성도 일부 구현했다. 실제 같은 공간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 "기술과 사람이 상호 작용하는 것 보고 싶다"

이진하 CPO는 이미 스타트업 업계에선 ‘차세대 혁신가'로 꼽힌다. 이진하 CPO는 일본 도쿄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MIT 미디어랩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미디어랩 재학 시절 손을 투명 스크린 뒤로 넣어 3차원 공간에서 데이터를 조작하는 컴퓨터인 ‘스페이스톱'을 개발해 눈길을 끌었다. 2015년에는 삼성전자에서 최연소 수석연구원과 그룹장 등을 역임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포드(Ford), 마텔(Mattel) 등과 솔루션 개발을 협업하고 있다.

스페이셜은 우버 창업자인 개럿 캠프와 징가 창업자 마크 핑커스, 삼성넥스트 등 글로벌 파트너로부터 시드 투자를 받았다. 지난 1월에는 카카오벤처스가 5억6550만원을 투자했다.

‘학구파’인 이 CPO가 창업의 길로 뛰어든 이유는 기술과 사람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였다. 이 CPO는 "사람과 기술, 제품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제 전공분야"라며 "논문을 쓰기보단 직접 제품을 만들고, 제품을 누군가가 잘 이용하는걸 지켜보는 게 더 적성에 맞았다"고 말했다.

스페이셜 솔루션 소개 화면. / 유튜브 영상 갈무리.
스페이셜 솔루션 소개 화면. / 유튜브 영상 갈무리.
그는 컴퓨터가 2차원 스크린을 넘어 스페이스(Space)로 확장하는 방식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봤다. 이 CPO는 "스크린이 아닌 스페이스에서 디지털 정보를 조합하면 그만큼 생각의 차원이 2D에서 3D로 확장된다"며 "공간을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컴퓨팅이 미래 기술이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아직 세계적으로 AR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데이터 송수신 환경에 제약이 있는 것은 물론, 기기 가격도 적지 않다는 점에서다.

이 CPO는 "스마트폰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어 이용자 경험(UX)을 혁신하기에는 어느 정도 제약이 있다"며 "헤드셋은 만약 보편화되면 기존 UX를 정의하는 방식 모두를 흔들어놓는 혁신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스페이셜 솔루션은 B2B(Business To Business) 플랫폼을 지향한다. 기술 혁신이 가장 빠르게 적용되는 분야가 기업 환경이라는 점에서다.

이 CPO는 "애플 매킨토시 컴퓨터도 기업에서 사용되다 점차 사용성이 개선되며 일반 소비자 대상 제품군으로 확대됐다"며 "새로운 혁신기술을 도입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소비자가 충분히 감당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기술 패러다임이 바뀌면 가장 먼저 적용되는 분야는 비즈니스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스타트업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 CPO는 "시장 타이밍만 노리기보단 충분히 자신만의 색을 찾은 뒤에 나서라"고 조언했다.

이 CPO는 "처음부터 시장에서 어떤 서비스가 성공할거란 가능성만 엿봤다면 정작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회사를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창업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더 흥미로운 세상이 될거라 믿는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