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올해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습니다. 지난주 모처럼 눈다운 눈이 내려주니 출근길 걱정에도 반가왔습니다. 일찍 나와 움직여대는 제설차의 부지런함이 살짝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로 실컷 하고 싶었던 눈 구경이었습니다. 저희 수목원에도 하얀 솜이불이 내려 덮여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을 실감케 했습니다.

눈 내린 국립수목원의 육림호 풍경
눈 내린 국립수목원의 육림호 풍경
그쯤 되니 눈 속에서도 피는 앉은부채 소식이 궁금해집니다.
앉은부채는 그야말로 미스테리한 식물입니다. 아직도 추측이나 해볼 뿐인 사항들이 많아서 올해는 그것에 대한 궁금증들을 어느 정도 풀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추측성의 이 글을 써봅니다.

눈 속에 핀 앉은부채
눈 속에 핀 앉은부채
앉은부채는 성 체계만 해도 확실히 알려진 게 아닙니다. 보통 15~40일 정도의 개화기를 갖는데, 암술이 먼저 피는 암술기가 1~2주 정도 지난 후 수술이 돋는 수술기로 전환해 2~3주 정도 더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암술기에서 수술기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암술과 수술이 중첩되는 양성(bisexual) 기간이 며칠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짧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관찰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양성기의 사진을 확보하기가 어렵습니다.

앉은부채의 암술기 꽃차례(왼쪽)와 수술기 꽃차례(오른쪽)
앉은부채의 암술기 꽃차례(왼쪽)와 수술기 꽃차례(오른쪽)
앉은부채 꽃차례의 수술기 모습
앉은부채 꽃차례의 수술기 모습
앉은부채 꽃차례의 양성기로 추정되는 모습
앉은부채 꽃차례의 양성기로 추정되는 모습
수술이 발생할 징조 없이 암술기 상태에서 이미 결실한 것 같은 개체도 있습니다. 그 역시 확실한 관찰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울러 앉은부채가 평생 하나의 특정한 성 체계만을 유지하는 건지 아니면 도중에 변하기도 하는 건지도 꾸준히 관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술기로 접어들 징조 없이 암술기에서 결실한 듯한 모습
수술기로 접어들 징조 없이 암술기에서 결실한 듯한 모습
앉은부채가 암술과 수술의 성숙 시기를 달리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가수분(제꽃가루받이)을 피한다는 뜻입니다. 앉은부채보다 더 진화된 식물군인 초롱꽃과 식물이나 국화과 식물 같은 경우에서는 수술이 먼저 성숙하고 암술이 나중에 수술보다 길게 자라나는 방식이라 자가수분이 일어날 확률이 적습니다. 그런데 앉은부채처럼 암술이 먼저 성숙하는 방식은 수술기로 넘어갈 때 암술이나 수술의 길이가 달라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가수분을 어느 정도 허용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비교적 고지대에서 자라는 모데미풀의 경우에도 대개 타가수분(딴꽃가루받이)을 취하지만 수분매개자인 곤충의 활동을 장담할 수 없기에 자가수분을 어느 정도 허용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것처럼 수술보다 암술이 먼저 성숙하는 메커니즘을 가진 식물은 구조적으로 자가수분을 허용한다고 볼 수 있으며, 앉은부채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앉은부채는 호흡열로 휘발성 암모니아 계열의 물질을 분비해 냄새를 풍기고, 불염포 안쪽을 따뜻하게 유지해 수분매개자를 끌어들이는 것으로도 알려졌습니다. 반면에 여름에 꽃 피는 애기앉은부채는 열을 발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름은 더운 데다 곤충의 활동이 활발한 시기이므로 구태여 냄새를 많이 피우거나 난방을 가동해서 수분매개자를 끌어들이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애기앉은부채는 덩치가 작아도 되고, 불염포의 모양을 앉은부채보다 더 개방한 형태로 만들어 수분매개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므로 수분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이른 봄에 피는 앉은부채와 여름에 피는 애기앉은부채
이른 봄에 피는 앉은부채와 여름에 피는 애기앉은부채
앉은부채는 땅바닥 가까운 높이에서 꽃을 피웁니다. 파리류 같은 날개 달린 방문자의 출입도 허용하고는 있지만,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거미류 같은 방문자의 방문을 더욱 선호하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앉은부채는 꽃차례에 달린 거의 모든 꽃에서 결실이 일어나 전체적으로 수류탄 모양으로 자라납니다. 몇몇 꽃만 결실하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꽃에 결실이 일어납니다. 구형의 꽃차례에 달리는 거의 모든 꽃의 암술에 빠짐없이 꽃가루가 전달되려면 360도 방향으로 사방팔방 꽃차례를 돌아다니는 매개자가 필요합니다. 이른 봄에 그렇게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매개자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앉은부채가 자가수분을 어느 정도 허용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추정을 그래서 해보는 것입니다.
타가수분만 한다고 해도 의문은 가시지 않습니다. 과연 누가 와서 수분을 해주는 걸까요? 앉은부채의 불염포가 대개 암적색을 띠는 이유는, 그런 색의 꽃들을 잘 보는 파리류를 찾아오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앉은부채의 주요 수분매개자가 파리류라고 단정 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앉은부채의 주요 수분매개자를 특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건 우리나라 연구진뿐이 아닙니다. 일본의 조사 보고서에서도 앉은부채를 방문하는 동물상이 매일 바뀐다고 했습니다.

앉은부채는 꽃차례의 꽃을 거의 일시에 피웁니다. 효율적인 수분을 위해 대개의 식물은 꽃차례의 꽃을 시간 차를 두고 피우는데 앉은부채는 왜 구형의 꽃을 일시에 피우는 겁니다. 그건 아마도 한꺼번에 다량의 꽃가루를 내서 밑에 쌓아두어야, 방문자들의 몸에 부착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러지 않나 싶습니다. 앉은부채를 방문하는 동물의 대부분이 이동성이 크지 않은 종류들로, 꽃차례에 방문해 1~3시간 정도 머물러 있으며, 대부분이 몸에 앉은부채의 꽃가루를 많이 붙이고 있다고 합니다. 방문자의 방문 시간이 길다는 것은 그들이 먹이활동을 하려고 방문하는 게 아니라는 방증일 수 있습니다. 그런 방문자들은 꽃차례에서의 활동이 적극적이지 않다 보니 수분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므로 앉은부채는 다른 기작에 의해 수분이 일어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를테면 바람 같은 것! 바람이 불어 방문자에 의해 들여온(또는 아래쪽으로 떨어뜨려 놓은) 불염포 안의 꽃가루가 회오리치면서 수분이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너무 억지스러운 추측일까요?

앉은부채는 바람이 불어 들어오면 회오리가 치기 좋은 모습의 나선형 구조로 되어 있다
앉은부채는 바람이 불어 들어오면 회오리가 치기 좋은 모습의 나선형 구조로 되어 있다
앉은부채의 불염포는 아래쪽에서부터 말린 나선형 구조라 외부에서 바람이 발생해 들어오면 회오리치기 좋습니다. 그러면 수술기의 꽃차례에서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꽃가루를 흩날려 방문자 몸에 잘 붙게 하고, 암술기의 꽃차례에서는 묻어 들어온 꽃가루를 비산시켜 각 꽃의 암술로 옮겨줄 것입니다. 둥근 나선형 구조의 불염포는 내부온도 유지 외에 꽃가루받이를 도와주는 역할도 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앉은부채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방문자를 선호하고, 그들이 오래 머물 수 있는 휴게 공간 시스템을 갖추어놓고 바람이 불기만을 기다리게 되지 않았을까요? 충매를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풍매에 가까운 수분 방식을 앉은부채가 취한다고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문자에게 있어 앉은부채는 식당이 아니라 휴게소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이 엉뚱한 상상에 증거로 삼을 만한 게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풍매화는 다량의 꽃가루를 생산하는 특징이 있는데, 앉은부채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앉은부채는 정말이지 아주 많은 꽃가루를 불염포 바닥에 샛노랗게 깔아놓습니다.

바닥에 많은 양의 노란색 꽃가루를 떨어뜨려놓은 모습(왼쪽)
바닥에 많은 양의 노란색 꽃가루를 떨어뜨려놓은 모습(왼쪽)
앉은부채는 결실률이 낮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건 아마도 앉은부채가 특정 수분매개자가 아닌 불특정 수분매개자를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이른 봄에 개화하는 앉은부채의 특성상 불특정 매개자에 의존하는 수분 방식을 고수하다 보니 결실률이 낮아지는 단점을 피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자가수분을 거의 하지 않고 재방문을 보장하기 어려운 방문자에 의한 타가수분만을 기대해야 한다면 결실률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위의 추정대로 방문자를 이용한 풍매를 하는 게 맞는다면 높은 결실률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앉은부채의 8월 열매
앉은부채의 8월 열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모두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올해는 이런 의문들을 모두 풀어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난겨울 강수량이 부족해서 해거리하는 앉은부채가 많으면 어쩌나 걱정입니다. 이번 눈 받아 마시고 기운 차려서 제대로 된 꽃을 잔뜩 피워줬으면 좋겠습니다.
※ 외부필자의 원고는 IT조선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동혁 칼럼니스트는 식물분야 재야 최고수로 꼽힌다. 국립수목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혁이삼촌’이라는 필명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