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질병' 낙인 임박…동조·방관하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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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9.05.25 11:30 | 수정 2019.05.25 16:15
주말 게임산업인들의 눈길이 온통 스위스 제네바로 쏠렸다. e스포츠대회가 열리지 않았다. 게임 관련 신제품 발표나 컨퍼런스, 개발자회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세계보건기구(WHO) 제72차 총회(5.20~5.28)다.

. / WHO 갈무리
게임인들이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이 국제회의를 왜 주목할까. 새로 도입할 질병항목(코드) 때문이다. 한국의 8만 게임산업인은 자칫 도박장 업주나 마약상 취급을 받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WHO 총회는 새 국제질병 표준분류기준(ICD)에 게임이용장애(Gaming Disorder)를 넣을지 결정한다. 24일(현지시각) 본격 논의를 시작, 28일에 최종 확정할 전망이다. 회원국의 특별한 반대가 없는 한 그대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 과학적 근거도 없는 질병코드화

총회 의결 단계까지 왔지만 게임을 중독성 질병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게임산업계는 물론이고 의료·심리학계 내에도 반대 의견이 있다. 게임을 질병이라고 할 만큼 확실한 과학적 근거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근거로 나왔던 연구들도 게임 자체의 중독성을 확인하지 못했다. 인터넷 중독을 비롯한 다른 요인과 혼재됐다. 우울, 불안, 충동조절장애와 같은 증상도 다른 정신장애와 제대로 구분되지 않는다. 게임이 원인이 아니라 기존 정신장애가 게임을 통해 드러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게임중독 진단법도 신뢰도가 확 떨어진다. 보통 자가진단법을 쓴다. 그런데 중증인 사람은 자신의 중독 성향을 낮추려 하고, 경증인 사람은 되레 높이려 하기 마련이다. 게임과몰입 원인이 게임인지, 당사자 성향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외려 게임을 즐긴 어린이가 사회성과 지적·지각능력 향상에 긍정적이며, 폭력성과 무관하다는 국내외 연구결과는 차고 넘친다. 심지어 게임이 항우울제만큼 우울증 치료에 긍정적이라는 연구도 있다. 물론 이러한 연구들 역시 더 검증이 필요하다. 확실한 것은 ‘게임과몰입=질병’이라는 등식이 아직 성립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 낙인효과 어찌할 것인가

게임은 TV, 인터넷과 함께 우리나라 국민이 즐기는 3대 여가생활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8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게임은 5.5%로 TV시청 45.7%, 검색과 채팅, 소셜미디어 이용 등 인터넷 14.1%에 이어 세 번째를 차지했다.

그 비중은 날로 커진다. 2년전 조사와 비교해 TV, 인터넷은 줄고 게임은 높아졌다. 청소년 게임 이용은 인터넷보다 높다. 모두 질환자 취급을 받게 됐다. 세간에는 "게임이 이제 질병이 됐으니 이를 핑계로 병역의무를 면제받아도 되겠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냥 우스개로만 들리지 않는 게 우리 현실이다.

게임은 매출 12조원이 넘는 우리나라 주력 산업이다. 수출도 4조원에 달한다. 콘텐츠수출의 56%(2017년)를 차지하며 세계시장점유율 5위 안에 든다.

게임은 5세대 통신시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과 접목해 차세대 킬러콘텐츠로 떠올랐다. 다른 산업과 융합한다. 일자리 창출효과까지 높아 게임의 산업적 가치는 더욱 커진다. 이러한 산업 종사자에게 이제 ‘질병 유발자'라는 오명과 낙인이 찍힌다.

◇ 절차도 불투명

WHO가 질병으로 분류하는 과정과 절차는 매우 까다롭다. 사례 보고(Case Report)로 시작한다. 사례가 많아져 일련의 연속성(Case Series)을 보이면 정밀한 검증(Screening)을 거치다. 이후 질병으로 판단(Clinical Judgement)한다. 어떤 경우 10~20년이나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 게임장애 질병 등재 과정과 절차가 뒤죽박죽이다. 먼저 게임을 병리적 관점으로 시작했다. 작위적으로 진단척도를 만들었고, 신뢰성 낮은 설문조사를 적용했다. 처음부터 아예 예단하고 들어간 셈이다. 검증과정도 짧고 허술하다. 제대로 공개조차 되지 않았다.

이처럼 통상적이지 않은 절차와 과정 때문에 이번 게임 질병코드 등재를 두고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의심이 끊임없이 나온다. 게임을 질병으로 규정하면 신규 시장이 생길 수 있는 정신보건·심리치료계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 사회적 합의 없이 보건복지부 의견만 반영

게임산업계 물론이고 이용자까지 반대하는 ICD 개정안이다. 정부가 이번 WHO 총회에서 강력하게 반대의 뜻을 밝혀야 한다. 문제는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이다. 총회에 참석할 한국 대표단은 보건복지부 관료를 비롯한 보건의료계 인사들로 구성됐다. 대부분 질병코드화에 찬성 입장이다.

보건복지부 대변인실은 ‘총회에서 어떤 입장을 밝힐 것이냐’는 IT조선 기자의 질문에 "어떤 발언을 할지 알지 못하며, 알더라도 국제회의 전략상 입장을 내기 전까지 공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반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간 박능후 장관의 국회 답변, 담당 관료들의 토론회 발언 등을 통해 게임장애 질병화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혀왔던 보건복지부다.

정작 게임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조용하다. 담당 과장이 방송 토론회에 참석해 반대의견을 내거나 산하기관장이 언론에 기고하는 정도다. 문체부가 무슨 이유인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게임산업계 시각이다. 전임자들과 달리 게임을 비롯한 콘텐츠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 박양우 장관이다. 그의 침묵이 지속되면 모처럼 형성된 기대감은 실망감으로 바뀐다. 상처는 더욱 크다.

그간 셧다운제를 비롯한 각종 게임 규제에 이제는 질병 등재까지 수난이 끊이지 않는 게임산업계다. 정부마저 게임산업계 편이 아니다. 게임중독세와 같은 형태의 또다른, 더 큰 수난도 예고됐다.

"기댈 곳도,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다." 게임 뿐만 아니라 콘텐츠 산업 전반의 시각이다. 최근 콘텐츠 관련 학회, 공공기관, 협단체 53곳과 31개 대학 등 총 84개 단체가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준비위원회(이하 공대위)를 구성했다.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단체가 신속하게 결집했다는 것은 "우리도 이제 더이상 참지말고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절박감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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