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천자] (100) 나목(裸木) ②… 깊고 깊은 자기만의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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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6.23 04:00
‘하루천자로 고전(古典) 읽기’는 미증유의 사태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고전을 골라서 수회에 나눠 필사하는 캠페인입니다.

이번 주 필사감으로는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박완서(朴婉緖, 1931~2011)의 데뷔작 《나목(裸木)》을 골랐습니다. 박완서는 40세의 나이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당선된 이후 15편의 장편 소설과 100편이 넘는 단편 소설, 그 외 많은 산문과 동화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작품활동을 한 ‘영원한 현역 작가’였습니다. 작가 자신이 ‘첫 작품이자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 꼽은 《나목》을 필사하면서 그 이유를 찾아보세요. 2012년 세계사에서 나온 〈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을 참조했습니다. /편집자 주

교육열이 높았던 어머니 덕에 1938년 개성에서 경성으로 이사온 박완서는 1950년 6월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한 달도 안 돼서 6.25 전쟁이 터졌다. 서울이 인민군의 점령 아래에 있던 전쟁 발발 직후 박완서네 가족은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을 뿐만 아니라 8월께까지는 학교도 계속 다녔다. 당시 박완서는 좌익 사상에 호의적이었지만 점차 회의를 느끼고 학교에도 안 나가게 되었다. 전쟁 기간 중에 오빠와 숙부가 목숨을 잃어,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미8군 PX의 초상화부에서 근무했다. 이후 서울 동화백화점에서 일하다 같은 동화백화점 측량기사였던 서울토박이 집안 출신인 호영진과 1953년 결혼해 1남 4녀의 자식을 두었다. 사진은 채 돌이 안 된 맏딸 호원숙씨를 안고 있는 젊은 박완서 작가.
나목(裸木) ② (글자수 835, 공백 제외 626)

나는 군밤을 질겅질겅 씹으며 마음껏 웃고 침팬지의 율동에 장단을 맞춰 어깨를 흔들었다. 드디어 태엽이 풀리면서 침팬지의 동작은 서서히 느려지고 유쾌한 애주가의 폭음은 부시시 멎었다. 구경꾼들은 하나둘 비어갔다. 흥겨운 시간은 삽시간에 지난 것이다. 침팬지만이 사람들한테 아첨 떨기를 멈추고 한껏 외롭게 서 있었다. 그의 고독이 가슴에 뭉클 왔다. 사람과 동물로부터 함께 소외된 짙은 고독과 절망.

나는 옥희도 씨를 쳐다보았다. 그는 화필을 놓고 하염없이 잿빛 휘장을 바라볼 때처럼 그런 시선으로 침팬지를 보고 있었다. 문득 나는 그도 역시 침팬지의 고독을 앓고 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나도 그를 도울 수 없음을. 좀 전의 충족감이 포말처럼 꺼졌다. 나는 그에게서 소리 없이 밀려나 있었다. 침팬지와 옥희도와 나……. 각각 제 나름의 차원이 다른 고독을, 서로 나눌 수도 도울 수도 없는 자기만의 고독을 앓고 있음을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중략)

나는 그때까지 찌르고 있던 그의 헐렁한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는 날쌔게 혼자 골목길을 들어서서 다시 한 번 꼬부라졌다. 그리고 먼발치로 이지러진 내 집 지붕을 똑바로 바라보며 돌진하듯이 달렸다. 그가 자기만의 고독을 아무에게도 나누려 들지 않듯이 나도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나만의 일이 있는 것이다.

긴 골목길을 어제와 조금도 다름없이, 공포와 이제는 거의 육체적인 통증으로 변해버린 아픔을 혼자 견디며 걸어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나눌 수 없는 나만의 일인 것이다. 저녁을 먹고 왔다고 말하고 곧장 장방형의 내 방으로 들어온 나를 어머니는 따라 들어와서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가서 주무세요." 나는 참다못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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