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원의 오덕이야기] ㉒권선징악 깨뜨린 슈퍼로봇 애니메이션 '콤바트라V·볼테스V'

입력 2018.06.02 06:00

슈퍼로봇 애니메이션은 1956년 ‘철인 28호’의 탄생으로 시작됐다. 어린이의 동심을 휘어잡던 슈퍼로봇은 1970년 중반 마징가Z가 나올 때까지 정의가 악과 싸워 이기는 ‘권선징악’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갑자기 등장한 적은 인류에 해를 줄 뚜렷한 이유도 없이 나타났고, 이들은 인류의 영웅인 슈퍼로봇에 맞서 싸우며 멸망의 길을 걷기만 했다.

콤바트라V. / 유튜브 갈무리
하지만, 1976년 4월 일본에서 방영된 ‘초전자로보 콤바트라 브이(V)’는 종전 슈퍼로봇 스토리와 딴판이었다. 권선징악 이야기 대신 적군인 캠벨 행성의 등장인물이 자신들끼리 내부 갈등과 고뇌를 겪는 등 스토리가 달라졌다. 어린이 애니메이션에 철학적인 내용이 담기기 시작한 것이다.

콤바트라V의 적진 보스인 ‘대장군 가루다’는 자존심이 강하고 기사도 정신을 가진 인물이지만, 인질 작전이나 암살 계획을 실행하는 등 비정한 면을 지녔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인 ‘오레오나 여왕’의 뜻에 따라 움직이지만, 자신이 오레오나의 아들이 아닌 오레오나가 만든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깨닫고 여왕에게 반기를 들었다. 가루다는 거대 로봇을 타고 콤바트라V에 맞서지만 전투에서 진다. 가루다는 폭발하는 로봇 속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여성 하프로봇 미아의 시체를 끌어안으며 최후를 맞는다.

가루다와 미아. / 야후재팬 갈무리
가루다의 이런 모습은 악당은 무조건 나쁜 놈이란 권선징악 애니메이션 스토리 프레임을 철저하게 깨부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 권선징악 프레임 깨뜨린 ‘나가하마 로망 로봇 시리즈’

콤바트라V를 만든 이는 로봇 애니메이션 ‘용자 라이딘’과 프랑스 혁명기를 무대로한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그려낸 ‘나가하마 타다오(長浜忠夫)’ 감독이다.

나가하마 타다오 감독, 그는 1980년 프랑스 합작 애니메이션 ‘율리시즈 31’ 제작 중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 야후재팬 갈무리
나가하마 감독은 1970년대 중반까지 슈퍼로봇 애니메이션의 스토리 라인이던 권선징악에서 탈피해 적과 아군 캐릭터 속에 사랑과 갈등, 혈연과 숙명 등을 넣었다. 어른이 봐도 괜찮을 만큼의 깊이 있는 인간 드라마를 슈퍼로봇 애니메이션에 녹여낸 것이다.

그는 적군인 외계인에게도 지구를 침략해야만 하는 정당한 명분을 부여했고, 캐릭터 시점에 따라 선과 악이 달라지는 등 당시 어린이가 이해하기에 다소 어려운 면도 추가했다. 하지만 그의 참신했던 도전은 이미 로봇 애니메이션에서 졸업한 20대 젊은이를 애니메이션 팬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혈연과의 사투, 높은 드라마성 추구한 ‘볼테스V’

나가하마 감독이 콤바트라V 후속작으로 1977년 ‘초전자머신 볼테스 파이브(V)’를 선보였다. 이 작품에서는 혈연간 다툼과 숙명이 그려졌다.
볼테스V 합체 영상. / 유튜브 제공
이 작품의 핵심 인물은 슈퍼로봇 볼테스V를 조종하는 주인공 ‘고우 켄이치’가 아닌 그의 아버지인 고우 켄타로(라 골)다. 보아잔 행성의 과학장관이자 국왕의 정통 후계자였던 ‘라 골’은 자신의 라이벌인 ‘즈 잔바질’에 의해 권력을 잃었다. 자신의 부인인 로자리아와는 생이별을 한다.
젊은 시절의 ‘라 골’. / 야후재팬 갈무리
반란군에 몸 담고 활동하던 라 골은 우주에서 1년간 표류한 후 지구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자신을 구해준 지구인 여성 과학자 ‘고우 미쯔요’와 결혼해 3명의 자식을 낳는다. 외계인이지만 지구인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전쟁을 좋아하는 즈 잔바질의 지구 침략을 예견한 라 골은 지구인 과학자와 힘을 합해 거대 합체 로봇 ‘볼테스V’와 기지 ‘빅팔콘’을 만든다.

라 골의 예상대로 즈 잔바질의 치구 침공이 시작됐지만, 정작 지구침략을 지휘한 것은 자신의 첫 번째 아들인 ‘하이넬’ 왕자였다. 하이넬은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잔바질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피를 나눈 형제인 고우 켄이치와 사투를 벌인다.

라 골의 첫 번째 아들인 하이넬(왼쪽)과 지구에서 낳은 두 번째 아들 고우 켄이치. / 야후재팬 갈무리
나가하마 감독은 볼테스V 시청 타겟층을 어린이는 물론 어른이 봐도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높은 드라마성을 추구했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 애니메이션 업계는 볼테스V가 상업적인 면에서도 전작인 콤바트라V와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한다. 다만, 당시 주요 상품이던 초합금 장난감이 볼테스V의 합체 기능을 재현해 내지 못했던 점이 단점으로 지목됐다.

미래로보 달타니어스. / 야후재팬 갈무리
나가하마 로망 로봇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분류되는 1979년작 ‘미래로보 달타니어스(未来ロボ ダルタニアス)’는 나가하마 감독이 중도 하차하며 주목받지 못했다. 그는 ‘베르사이유의 장미’ 제작 문제로 작품을 만드는 중 빠졌고, 결국 미래로보 달타니어스는 어린이 시청자에 초점을 맞춘 작품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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