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는 저임금·인력난 日 애니 업계 구세주"

입력 2020.03.08 06:00

일본 애니메이션(이하 애니) 시장은 연간 2조엔(22조4000억원)에 달한다. 전 세계 각지에는 열혈 팬으로 넘쳐난다.

하지만 일본 애니 산업계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달리 저임금, 인원 부족 등 문제로 허덕인다. 한국의 봉준호 감독은 최근 아카데미 4관왕을 석권하는 등 성과를 냈지만, 일본은 사정이 다르다. 현 ‘제작위원회' 체제 한계에 따라 창작면에서 어려움이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에서 재미있는 콘텐츠가 나오지 않는 이유가 제작위원회 체제에 있다는 것이다. 스폰서 등 돈을 대는 기업의 입김이 콘텐츠 제작 과정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 업계에 ‘구세주'처럼 등장한 기업이 바로 넷플릭스다. 넷플릭스는 직접 투자를 통해 애니 제작사에 만연한 저수익 구조를 해결하고, 제작위원회 타파로 창작자 의도에 맞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넷플릭스를 통해 4월 세계 190개국에 방영될 ‘공각기동대 SAC 2045’. /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행보에 현지 애니 감독이 호평을 보낸다. 시오타 슈조(塩田周三) 폴리곤픽처즈 대표는 IT조선과의 인터뷰를 통해 "넷플릭스의 공격적인 투자가 애니 콘텐츠 제작비를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넷플릭스가 빠듯한 예산으로 여유가 없던 일본 애니 콘텐츠 제작 현장의 숨통을 트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2013년 당시 23분 분량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데 필요한 제작비는 최대 2000만엔(2억2400만원) 수준이었지만, 넷플릭스 투자 이후 같은 품질과 분량의 콘텐츠를 만들 때 3000만엔(3억3600만원)은 보통이고 최대 4000만엔(4억4800만원) 수준까지 제작비 상한선이 올라갔다"고 밝혔다.

시오타 대표는 애니 콘텐츠 라이선스 수익 역시 기존 대비 몇십배 증가했다고 전했다. 제작 환경이 전반적으로 개선됐다는 것이다. 넷플릭스의 애니 시장 참여는 기존 ‘제작위원회'에 참가하지 못했던 이른바 ‘아웃사이더 스튜디오'에 기회를 제공한다. 다채로운 산업 분야에서 다수의 기업이 참여하는 제작위원회라는 낡은 체제에서 벗어나 소규모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도 넷플릭스와의 계약을 통해 자신들의 작품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일본 애니 업계 대변자 역할을 하는 일본동화협회에 따르면, 일본 애니 시장규모는 2017년 기준 2조1527엔(24조1100억원)이다. 해외 매출 증가로 2011년부터 꾸준한 증가세를 보였다. 일본 국외로 수출되는 전체 콘텐츠 중 애니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 기준 57%(9948억엔·11조1400억원)에 달한다. 일본에서 만든 신작 TV애니 수는 2017년 기준 연간 340개며, 제작 분량은 116만분을 넘어선다.

하지만, 시장규모 확장에도 불구하고 애니 제작자에게 돌아가는 임금은 턱없이 낮은 편이다. 2019년 공개된 ‘애니메이션 제작자 실태 조사' 보고서를 보면, 애니 제작자(애니메이터)의 1일 평균 노동시간은 10시간에 달하고 월간 휴일은 5.4일이다. 반면, 월급은 12만~13만엔(134만~145만원), 연봉으로 따지면 업계 평균 125만엔(1400만원) 수준에 불과하다. 애니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없으면 제작자란 업을 지속하기 어렵고,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한 상황이다.

일본 애니 업계는 ‘제작위원회' 체제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동안 TV 방송국, 광고기업, 제작회사 등으로 구성된 ‘제작위원회’가 애니메이션 제작 사업을 이끌었다. 여러 회사가 참가하는 만큼 제작자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작품을 만들기 어렵고, 배당받은 제작비 역시 온전히 작품을 만드는 데 쓰기 빠듯했다. 좋은 작품을 만들려 해도 예산이 없다.

넷플릭스의 투자가 일본 애니 업계에 준 가장 큰 변화는 제작자가 작품 활동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애니 제작자는 제공받은 예산으로 창작자가 의도한대로 자유도 높게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30년 넘게 원화 및 작화감독을 맡아온 코사카 키타로(高坂希太郎) 감독은 IT조선과 인터뷰를 통해 "넷플릭스 등 인터넷 영화 서비스 회사가 애니메이션 작품에 거액의 돈을 투자하는 것은 기회"라고 말했다. 투자 받은 돈으로 지속적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넷플릭스는 일본에서 양질의 독점 애니 콘텐츠 발굴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2017년에는 공각기동대 제작사인 ‘프로덕션 I.G 등 일본을 대표하는 애니 제작사 5개사와 파트너십 계약을 맺었다. 2019년에는 애니 품질을 한 차원 더 끄집어 올리기 위해 4K HDR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을 프로덕션 I.G와 공동으로 선보인 바 있다.

넷플릭스는 2월 25일 일본을 대표하는 만화·소설 작가 6명(팀)과 손을 잡았다.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를 끌 수 있는 독점 애니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넷플릭스가 이번에 섭외한 일본 만화·소설가는 ‘클램프(CLAMP)’, ‘키바야시 신(樹林伸)’, ‘오오타가키 야스오(太田垣康男)’, ‘야마자키 마리(ヤマザキマリ)’, ‘오쯔 이치(乙一)’, ‘우부카타 토우(冲方丁)’ 등 6명이다. 주목받는 작가인 만큼 현지 애니 팬 사이서도 기대가 높다.

넷플릭스가 일본에서 독점 애니 콘텐츠 발굴에 힘을 쏟는 이유는 전 세계 애니 팬 층이 두텁다는 확신 때문이다. 넷플릭스 한 관계자는 "정확한 숫자는 밝힐 수 없지만 애니 시청자 수는 전 세계적으로 많다"라고 밝혔다.


키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