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에 현실화된 '약 자판기' 사업… 약사단체, 정부와 대립각

입력 2022.06.23 06:00

10년 가까이 발이 묶여왔던 화상투약기(약 자판기) 사업이 규제샌드박스 실증특례를 부여받으며 일상생활 적용을 눈앞에 둔 가운데, 약사단체가 전면 거부를 선언하면서 첫 단추부터 진통이 예상된다.

약사단체는 의약품 오투약이나 지역약국 붕괴 등을 우려하며 실증특례 사업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비친 상태다. 심지어 약사들이 비대면 진료와 전자처방전 사업 등 정부가 추진하고자하는 모든 의료보건사업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갈등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대한약사회 회원들이 20일 오후 서울 중구 브라운스톤 앞에서 열린 약 자판기 저지 결의대회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 조선DB
관련 업계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에 따르면 제22차 정보통신기술(ICT)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회에서 ‘일반의약품 스마트 화상판매기(원격 화상투약기)’ 등이 포함된 여러 규제특례 과제가 통과됐다.

앞으로 화상투약기 사업은 서울 지역 10곳에서 3개월간 시범사업을 진행한 뒤 운영 결과를 바탕으로 확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과기부는 "현행 약사법에서는 약국 이외의 장소에서 약사의 의약품 판매를 금지해 일반의약품 스마트 화상 판매기를 통한 일반의약품 판매가 불가하다"며 "약국이 운영하지 않는 시간에도 전문약사와 상담을 통해 일반의약품 구매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화상투약기란 무엇일까?

화상투약기 사업은 개발업체 쓰리알코리아가 과기부와 복건복지부를 상대로 부작위 위법확인 소송을 제기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결론이 내려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새정부의 규제완화 의지가 맞물려 10년만에 사업 추진이 이뤄질 수 있었다.

화상투약기는 2012년 약사인 박인술 쓰리알코리아(3RKorea) 대표가 개발했다. 투약자가 영상장비로 약사와 화상통화를 한 뒤 의약품을 살 수 있다. 처방전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감기약, 소화제 등 11개 효능품목군의 일반의약품만 판매할 수 있다. 단, 화상투약기는 약국 앞에만 설치할 수 있다.

환자가 직접 약을 선택해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약사가 원격으로 약을 골라준다는 점에서 일반자판기와 차이점이 있다. 이는 의약품 오남용과 안정성 논란을 고려한 방식이다. 약사로부터 복약지도를 받는 만큼 단순한 ‘약 자판기’로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게 개발사의 입장이다. 비전문가들이 가정상비약을 파는 편의점보다 안전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화상투약기는 약이 잘못 전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약사와 환자 대화 내용을 6개월간 보관하고, 근거가 남도록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로만 결제하도록 했다. 약의 변질을 막기 위해 원격제어시스템으로 온도와 습도를 관리한다.

국내에 화상투약기가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이유는 새벽 시간에 응급실에 갈 여력이 없는 환자들 때문이다. 새벽에 여러 진통 등으로 일반의약품 처방을 받기위해 응급실을 방문하면 비용 부담이 크지만 화상투약기는 적은 시간과 비용만으로 처방이 가능하다.

이미 영국과 독일 등 유럽국가들은 일반의약품뿐만 아니라 전문의약품까지 의료용 IT기기를 통해 복약지도 정보를 환자에게 제공한다. 환자는 약사와 전화상담 후 자동판매기 형태의 ‘24시간 의약품 조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규제특례를 향한 10여년의 험난한 길

하지만 국내에 처음 화상투약기가 등장할 당시 복지부와 법제처 유권해석 결과 약사법 위반으로 판단돼 약국 화상투약기 설치 사업은 무산됐다. 그러다 2016년 국무총리실 산하 신산업투자위원회에서 약 자판기 설치 허용 방안이 규제 완화 대상으로 논의되고, 같은해 6월 27일 약 자판기 도입을 위한 ‘약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정부입법으로 발의됐다. 하지만 국회에서 임기만료로 폐기를 겪게 된다.

쓰리알코리아가 개발한 원격 화상투약기 / 쓰리알코리아
쓰리알코리아는 2019년 규제샌드박스 특별법 시행 이후 실증특례를 신청했지만 안건이 상정되지 않자 지난해 8월 과기부와 복지부를 대상으로 서울행정법원에 부작위 위법확인 소송을 제기한다.

부작위 위법확인 소송에 따라 같은해 12월 제21차 ICT 규제샌드박스 심의위원회 안건에 상정, 재논의를 전제로 공식 안건 상정이 보류된다. 끝내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6개월 만에 열린 심의위원회에서 결국 실증특례 승인을 받게 됐다.

문제는 이번에 통과된 화상투약기 사업은 조건부라는 꼬리표에 시범사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수많은 조율 과제들이 산재돼 있다. 시범사업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상담약사의 범위다. 한 사람의 상담약사가 화상투약기를 얼마나 관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에서 입장 차가 큰 만큼 조율 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복지부가 제시한 부가조건을 살펴보면 약국개설자가 등록된 약국에 판매 시스템을 설치하고 본인이나 개설자가 고용한 약사가 시스템을 통해 일반약을 판매해야 한다고 적시돼 있다. 이때 화상 복약지도를 통해 판매하려는 약사는 판매시스템 설치 약국개설자와 고용계약을 체결해야 하며 그 외 약국개설자가 아닌 자에게 고용돼서는 안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또한 복지부는 11개 약효군에 한정해 판매가능한 일반의약품 범위를 제시했는데 약사단체는 해당 약효군이 너무 많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화상투약기가 궁극적으로 의약품 택배 배달로 이어지면서 약국의 범위가 축소돼 동네 약국이 문을 닫게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범사업 이후에도 상용화에 필요한 법령 논의 과정에서 첨예한 갈등과 신경전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약사회, 정부 보건 사업 전면 거부 시사

대한약사회가 전면 투쟁을 내세우며 화상투약기 실증특례 사업을 반대하고 있어 시범사업조차 못하게 될 수 있다는 전망이 흘러나온다. 약사회는 약사법에 위배되는 실증특례 조건 부여를 차단하는 등 협조하지 않고 비대면 진료 대응 약정협의 전면 중단 등 정부와 본격적인 대립각을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약사회는 성명을 통해 "약 자판기 조건부 실증특례 부여 결정이 내려진 데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다"며 "약사(藥事) 정책의 카운터파트너로서 정부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온 대한약사회와 전국 8만 약사회원이 느끼는 분노와 배신감은 이루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약사회는 앞으로 복지부의 조건부 안을 검토해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응하는 한편, 사업 내용 중 약사법에 저촉되는 부분을 막아 시범사업 무력화하겠다는 계획이다. 또한 약 자판기 도입을 위한 약사법 개정 자체를 막아 화상투약기 사업을 위한 모든 정책 입법 행위를 봉쇄하겠다고도 했다.

특히 약사회는 화상투약기가 의약품 대면 판매 원칙을 훼손한다는 입장이다. 소비자의 선택권을 역규제하고 의약품 오투약으로 인한 부작용 증가, 개인 민감정보 유출, 신청기업 중심의 영리화 사업과 지역약국 시스템 붕괴 등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최광훈 대한약사회장은 "정부가 규제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심의위원회에 올려진 안건을 다 처리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고 이를 확인했다"며 "약사법 50조 ‘대면 원칙’을 규제샌드박스에서 무시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향후 시범사업 과정에서 견제하고 법적인 문제점을 계속 강조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실증특례 사업 모델에서 약사법 위반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선 법률 검토와 대응을 준비 중이다"며 "더불어 시범사업이 실제 진행되지 않도록 회원 안내도 생각하고 있다. 실증특례가 허용된 만큼 시범사업 중에 이번 무모하고 위험한 사업이 진행되지 않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덧붙였다.

약사계에서는 최근 대한약사회 집행부가 코로나19 관련 약국 대면투약료 신설과 수가협상 5년 연속 인상률 1위 등 다양한 성과를 내며 약사들의 지지를 얻어왔지만, 이번 화상투약기 규제샌드박스 현실화를 막지 못한다면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밖에 약사회가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비대면 진료부터 전자처방전 등 윤석열 정부가 대대적으로 내세운 보건의료사업에 협조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면서 연쇄 갈등이 전망된다.

지역약국을 운영하는 약사회 소속 약사는 "약사회가 수많은 공문을 통해 화상투약기에 대한 문제점을 정부에 보낸 걸로 알고있는데, 결국 정부는 약사 의견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정책 의지를 강행했다"며 "아직 지역 약사들에게 약사회가 언제, 어떻게 행동하자는 단체행동 내용은 알리지 않았지만 조만간 투쟁 비슷한 형태의 무언가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김동명 기자 simalo@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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