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부터 연이은 ESS화재로 정부는 2019년 6월, 종합 안전강화 대책을 내놨다. ESS 학계와 연구소, 시험인증기관 등 전문가로 구성한 조사위원회가 9개 기관 관계자와 함께 시험과 실증을 벌여 화재를 일으키는 요인 4가지를 추렸다. 원인은 복합적이며 배터리 결함을 화재 원인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애매모호한 분석이었지만, 업계는 상황이 일단락됐다며 안도했다.

그런데 1차 조사를 벌인 후 5건의 화재가 추가로 발생했다.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당황한 정부는 2019년 10월, 부랴부랴 2차 조사위원회를 꾸려 4개월간 추가 조사를 벌였다. 조사가 길어질수록 원인에 대한 추정이 여럿 나왔지만, 정부 측은 조사위원회 조사 결과를 기다리라고 했다.

6일 오후 ESS 사고원인을 발표하는 문동민 산업통상자원부 자원산업정책관(왼쪽)과 2차 조사위원회가 화재 원인으로 지적한 ESS 배터리 업체 로고 / IT조선 DB
6일 오후 ESS 사고원인을 발표하는 문동민 산업통상자원부 자원산업정책관(왼쪽)과 2차 조사위원회가 화재 원인으로 지적한 ESS 배터리 업체 로고 / IT조선 DB
6일 오후 2차 조사위원회가 결과를 발표했다. 5건의 화재 중 4건을 배터리 결함으로 추정하고, 기업의 소명을 충분히 반영했다고 밝혔다. 그 내용에 배터리 업계가 즉각 강하게 반발하면서 상황은 오히려 악화됐다.

배터리 업계는 배터리 결함 근거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고체가 열을 받아 액체로 녹는 현상인 용융 현상은 화재가 배터리로 전이됐을 때도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전후관계에 대한 근거 없이 용융 흔적이 배터리에 있으니 배터리 결함이라는 논리는 억지라고 주장했다. 기업 소명을 충분히 반영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업은 하루빨리 혼란에 빠져 위축된 ESS 산업을 정부가 일으켜주길 기대했다. 반년을 넘게 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목마르게 기다렸다. 이 기다림이 한순간 허무해졌다. 논란을 야기한 원인 분석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수습 대책 역시 구체적이지 않다. 기업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정부는 ESS 충전율을 옥내는 80%, 옥외는 90%로 제한하라고 했다. 충전율이 낮아지는 만큼 효율성도 떨어진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손실을 어떻게 보상할지 조사위원회는 밝히지 못했다. 더욱 큰 문제는 충전율을 줄이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이다.

ESS 설비에서 화재가 발생할 우려가 크면 긴급점검을 한다고도 했다. 인명과 재산피해 우려가 현저하면 철거와 이전 등 긴급명령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정비한다고 밝혔다. 긴급명령으로 발생하는 손실에 대한 보상지급 근거와 미이행에 따른 제재 방안도 마련한다고 덧붙였다.

인명과 재산피해 우려가 현저하면 누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상지급 근거는 무엇이며 미이행에 따른 제재는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다. 조사기간을 고려하면 실망스럽다.

ESS는 배터리가 아닌 시스템이다. 수많은 구성품으로 이뤄졌다. ESS시스템에 많은 기업의 운명이 걸려있다.

조사위원회 발표로 화재 원인이 분명해지기는커녕 더 큰 혼란만 야기했다. 배터리 결함이라면 똑같은 배터리를 쓴 해외 ESS시스템에 왜 화재가 없는지, 의문만 더 생겼다. 배터리 외 결함 가능성을 어떤 조건 아래 검증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발표내용대로라면 ESS시스템에 국산 배터리를 쓰면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정부는 금지 없이 충전율을 낮추는 대책만 내놨다. 의아할 따름이다.

조사위원회 결론도 아직은 추정일 뿐이다. 결함과 같이 심각한 문제를 이런 식으로 결론내리면 곤란하다. 이렇게 결함 있는 배터리를 어디에다 팔 수 있겠나. 수출할 때 해외 경쟁사들이 이번 조사결과를 들이밀 것이 뻔한 일이다.

정말 배터리 문제라면 업체들도 할 말이 없겠지만, 만약 다른 원인이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정부는 배터리 업체들이 완전히 납득하고 승복할 만한 조사 결과를 내놔야 한다.

정부가 오락가락 혼란을 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ESS 사업에 참여한 기업들은 골병이 든다. 이대로 가면 웃는 쪽은 중국과 같은 경쟁국 기업뿐이다. 정부와 배터리 업체 간 격돌에 ‘탈원전' 논란이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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