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을 비롯해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와 램리서치, 일본의 도쿄일렉트론 등 글로벌 반도체 장비 ‘빅4’가 한국에 속속 모인다.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이 심화하면서 ‘탈중국’ 대안으로 한국을 점찍은 것이다. 한국에 연구기지를 설립하고, 국내 기업들과 협력 강화 방안을 모색한다.

화성에 들어서는 반도체 클러스터 ‘뉴 캠퍼스’ 조감도. / 화성시청
화성에 들어서는 반도체 클러스터 ‘뉴 캠퍼스’ 조감도. / 화성시청
22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경기도에는 용인을 비롯해 이천, 기흥, 화성, 평택 등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가 조성된다. 기존에 사업장을 두고 있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들도 이곳에 모일 예정이다.

ASML은 최근 화성에 반도체 클러스터인 ‘뉴캠퍼스’ 조성을 위해 첫 삽을 떴다. 2019년 10월 사업 계획이 처음 세워진 이후 4년만이다. 2024년 12월까지 완공하고, ASML코리아 사옥을 이곳으로 이전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총 2400억원을 투자한다.

화성 뉴캠퍼스에는 극자외선(EUV)·심자외선(DUV) 노광장비 관련 부품 등의 재제조 시설과 첨단기술을 전수하기 위한 트레이닝 센터, 체험관 등이 들어선다. 관련해 피터베닝크 ASML CEO는 향후 연구개발(R&D) 및 제조 시설을 구축하는 방안도 추가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계 1위와 3위 반도체 장비 기업인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와 램리서치도 한국에 R&D 센터를 짓는다. AMAT는 7월 산업통상자원부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경기도 지역에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장비 R&D 센터를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개리 디커슨 AMAT CEO 역시 10월 초 한국을 방문해 기술 협력 강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AMAT는 반도체 제조 전 과정에 필요한 장비를 생산한다. 증착부터 식각, 급속 열처리, 이온 주입, 측정, 검사, 패키징 등 반도체 제조의 모든 단계에 능통해 업계에서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불린다. 시스템과 메모리 반도체를 모두 생산하는 삼성전자의 주요 협력사이기도 하다.

램리서치의 경우 4월 경기도 용인에 R&D 시설인 코리아테크놀로지센터(KTC)를 개관했다. KTC는 램리서치가 아시아 지역에 짓는 첫 R&D 센터다. 3만㎡ 규모에 최대 50개 장비가 들어가는 클린룸을 보유했다. 램리서치는 반도체 웨이퍼에 회로 패턴을 그리는 식각 장비가 대표 제품이다.

세계 4위 장비 기업인 일본의 도쿄일렉트론(TEL)은 2023년까지 2000억원을 투자해 기존의 화성 R&D 센터를 확장할 계획이다. 지상 6층, 3만3000㎡ 규모의 R&D 시설이 준공된다. TEL은 2012년 글로벌 반도체 장비 기업 중 최초로 국내에 R&D 센터를 설립했다.

올해 세계 4대 반도체 장비 기업들이 한국 투자에 적극적인 이유는 주요 고객사들의 주요 생산 거점이 국내에 모여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장비 매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평택·화성·기흥, 이천·용인 등에 반도체 사업장을 두고 있다.

또 한국은 ‘탈중국’ 대안으로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다. TEL의 경우 매출 4분의 1이 중국 시장에서 발생하지만, 미국이 대중 수출 규제를 강화하면서 중국 리스크 분산에 사활을 건 상태다. 매출 2위를 차지하는 한국 시장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반도체 업계는 장비 기업들의 한국 진출을 반긴다. 반도체 장비 확보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장비 기업들의 국내 수리 및 연구센터 설립은 공급망 안정화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제조사와 장비사 간 기술 협력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장비 기업들의 국내 투자가 R&D 센터 수준에 그친 만큼, 자체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장비 제조 시설을 유치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반도체 장비 기업들의 해외 투자는 이미 다양한 국가에서 진행되고 있다"라며 "반도체 생태계 전반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장비 생산 시설도 유치해 장비 제조 역량 강화에도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박혜원 기자 sunon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