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M&A 잇따른 좌초 위기…삼성 ‘빅딜’ 꿈은?

입력 2021.09.15 06:00

글로벌 반도체 업계가 대규모 인수·합병(M&A)을 추진 중이다. 부족한 분야를 직접 투자해 키우는 것보다 M&A를 통한 신속한 기술흡수로 연착륙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이같은 시도는 번번히 벽을 만난다. 반도체 기술 확보가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로 격상된 탓이다. 4년간 사법리스크로 ‘빅딜’을 중단했던 삼성전자는 3년 내 의미있는 M&A를 공언했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아 만시지탄(시기에 늦었음을 한탄하다) 형국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 겸 CEO / 엔비디아
14일 반도체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영국 경쟁시장청(CMA)은 미국 엔비디아가 반도체 디자인 기업 ARM을 인수할 경우 시장 경쟁에 중대한 우려가 발생할 수 있다며 심층 조사에 돌입했다. 영국 정치권도 영국 핵심 자산 기술을 보유한 ARM이 미국 기업 엔비디아에 넘어갈 경우 영국이 기술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다며 인수 불허를 촉구한다.

미 연방거래위원회(FTC)는 연초 엔비디아의 ARM 인수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거래 당사자에 자료 제출을 요청했다. EU와 중국에서도 이번 인수에 대한 분위기가 우호적이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1990년 설립된 ARM은 애플, 퀄컴, 삼성 등에 반도체 설계 기술을 제공한 회사다. 세계 스마트폰의 95%에 이 회사 기술이 채택됐다. 2020년 9월 엔비디아가 일본 소프트뱅크로부터 ARM을 400억달러에 인수하기로 합의한 직후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등 경쟁사가 기술 독점 우려로 반발했다. 최근에는 삼성전자와 아마존,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등이 미 FTC에 반대 의견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M&A를 여러 차례 훼방놓은 전례도 있다. 3월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업체인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와 일본 반도체 기업 고쿠사이일렉트릭이 체결한 22억달러(2조5000억원) 규모의 M&A는 9개월 심사 지연 끝에 무산됐다.

퀄컴의 네덜란드 반도체 회사 NXP 인수도 중국의 심사 지연으로 2018년 7월 무산됐다. 퀄컴은 투자자 보상 차원에서 300억달러(34조원)의 자사주 매입을 추진했고, 20억달러의 위약금도 물었다.

SK하이닉스는 2020년 10월 인텔의 낸드플래시 메모리 및 SSD 사업 부문(중국 다롄 공장)을 10조원쯤에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인수 절차를 밟는 중이다. 심사 대상 8개국 중 7개국(미국·EU·한국·대만·브라질·영국·싱가포르)이 승인했고 중국만 남은 상태다. SK하이닉스는 하반기 중 중국 당국의 승인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불허 리스크를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9년 7월 7일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일본으로 출국하는 모습 / 조선일보DB
삼성전자는 8월 이재용 부회장 경영복귀와 맞물려 3년 내 M&A 성과를 내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했음에도 조바심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반도체 자국주의 논리에 기반한 각국 정부의 반대로 M&A 무산이 현실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반도체 부족 현상으로 반도체 기업 몸값이 치솟는다는 점도 M&A 장벽을 높이는 요인 중 하나다.

앞서 반도체 업계는삼성전자가 M&A에 나설 유력 후보로 NXP반도체를 꼽았다. 하지만 최근 차량용반도체 수급난이 불거지고 전기·자율주행차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면서 NXP의 몸값은 80조원쯤으로 상승했다. 이에 삼성전자는 NXP 인수 계획을 사실상 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스위스 마이크로칩 일렉트로닉스, 독일 인피니언 등이 삼성전자의 새로운 M&A 후보 기업으로 꼽힌다.

미국 반도체 업체인 엔비디아의 ARM 인수 계획도 영국 규제당국이 국가 안보와 독점 우려 등을 이유로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불발될 가능성이 커졌다. 관련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독일 인피니언이나 미국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 등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관측이 있지만, 이 역시 같은 이유로 쉽게 성사되긴 어렵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3~4년 전 대비 인수 물망에 오른 기업들의 가치가 치솟아 삼성 입장에서는 적절한 인수 타이밍을 놓친 감이 없지 않다"며 "미중무역분쟁 등 첨단산업에서 각국 간 견제 움직임도 더욱 심화되고 있어 3년 내 M&A 추진을 앞둔 삼성의 부담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광영 기자 gwang0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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