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강국서 쌓은 기술력, 메이드인코리아 가치 높일 것
33개국 34개 현지 파트너와 해외 시장 교두보 마련할 계획

"회사 비전이 없는 게 우리 회사의 비전입니다."

얼핏 들어선 말장난 같다. 아니면 젊은 스타트업 대표의 소신 발언이거나. 하지만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발언의 주인공은 보안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동범 지니언스 대표다.

이동범 대표는 업계에 15년 넘게 몸담으며 보안 기술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100명이 넘는 직원을 이끄는 지천명(知天命)의 사업가이기도 하다.

목소리 높여 비전을 강조할 법도 한데 그는 비전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표한다. 공통의 비전만을 강요해 회사 구성원을 수단화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회사의 비전은 직원 개인의 비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비전 대신에 공유하고 싶은 단어는 ‘가치’다. 자신이 생각하는 회사의 핵심 가치를 잘 전달하되 조직원 각자의 가치도 존중하는 방식이다. 지니언스가 관련 업계와 결이 다른 행보를 보이는 이유다. 주력 사업 분야에서 업계 1위를 차지하며 활발히 해외 진출을 진행하는 모습이다.

IT조선이 이동범 대표를 만나 보안 업계 전반의 상황과 지니언스의 행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동범 대표. / 지니언스 제공
이동범 대표. / 지니언스 제공
나무보다는 숲을 봤다

"회사를 창업하고서 4년간 국제공통기준(CC) 인증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해당 기간 중에 공공기관에 보안 제품을 들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동범 대표는 회사를 설립했던 2005년을 회고하며 이같이 말했다. CC 인증은 국정원이 특정 제품의 보안이 적합한지 검증을 마치고 내주는 인증이다. 보안 시장 큰손인 국가·공공기관은 제품을 들일 때 CC 인증 여부를 반드시 확인한다. CC 인증이 보안 업체에 매우 중요한 사업 영역인 이유다.

지니언스는 이런 업계 흐름에 동참하지 않았다. CC 인증을 받고자 특정 기술을 끼워 맞추기보다는 경쟁력 있는 보안 기술 개발에 노력을 기울였다. 공공에서 안주하기보다는 영업팀이 직접 민간 영역을 찾아갔다.

이 대표는 "당시 영업팀은 이런 결정에 힘들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때 고생한 게 높은 기술력의 토대가 됐다"고 설명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매몰되기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감으로써 더 큰 이익을 취했다는 말이다.

실제 지니언스는 창업 첫해를 제외하면 매해 수익을 내는 성과를 올렸다. 네트워크접근제어(NAC)라는 보안 기술도 개발해 해당 분야에서 업계 1위로 이름을 올렸다. 기업 내부 전산망에 접속하는 PC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보안망이라 생각하면 된다.

보안 업계 최고 화제인 단말기위협 탐지∙대응(EDR) 솔루션을 2017년 한국에 최초로 내놓은 곳도 지니언스다. EDR은 PC나 서버 등 단말에서 보안 위협을 탐지하고 공격에 대응하는 솔루션을 말한다. 같은 해에 코스닥 상장도 마쳤다.

지니언스의 NAC 솔루션 모습. / 지니언스 제공
지니언스의 NAC 솔루션 모습. / 지니언스 제공
지니언스는 우수한 기술력을 기반으로 우정사업본부와 공군, 해군 등의 대규모 NAC 사업을 수주했다. 해외 진출도 NAC를 중심으로 활발히 진행하는 모습이다.

2016년 1월에는 미국에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미국 법인을 중심으로 유럽과 캐나다, 중동과 아시아 시장 등 다양한 곳에 활발히 진출했다. 동남아에는 필리핀,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등 다수 국가에 제품을 선보인 상태다.

앞으로 33개국 34개 현지 파트너와 함께 해외 시장 교두보를 마련하겠다는 게 지니언스의 계획이다. 자사 보안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를 해외 파트너사에 판매한 후 파트너사가 현지 기업에 제품을 재판매하는 방식이다.

한국 보안 시장의 성장, ‘네트워크 강국’이라 가능했다

이동범 대표는 한국정보보호산업협회(KISIA) 수석부회장이기도 하다. 업계 대표로서 바라보는 한국의 보안 산업은 어떨까.

이 대표는 "한국 보안 시장이 글로벌과 비교해서는 규모가 작지만 기술력은 뒤쳐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보안 업계가 성장한 배경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는 CC 인증제도다. 국가·공공기관이 CC 인증을 받은 제품만을 구매한다. 이 인증은 국내 시장에 진출한 해외 보안 업체보다는 한국 업체가 관심을 두고 참여하기 용이했다.

이 대표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CC 인증이 한국 보안 시장을 보호하는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CC 인증과 관련해 여러 문제가 있지만 보안 시장 초기 형성에는 일정 부분 기여를 했다는 설명이다.

한국이 네트워크 강국인 것도 보안 업계에 이점이 됐다. 다른 나라에 비해 네트워크 인프라 수준이 높다 보니 해외 보안 업체의 제품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다. 기능은 좋으나 성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반면 한국 업체는 빠른 네트워크에 적합한 보안 제품을 내놓으며 활약할 수 있었다.

그는 "빠른 네트워크 환경은 지금도 보안 업계 경쟁력의 원천이다"며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제공된 테스트 베드를 토대로 보안 기술을 높인다는 게 큰 장점"이라고 평가했다.

북한과 마주한 특수 상황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북한이 사이버 공격 수준을 높이면서 가장 큰 피해를 겪는 곳이 한국이다. 자연히 국내 보안 업체가 이에 대응하면서 보안 기술력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구매에서 ‘구독’으로,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한 때

한국 보안 시장에 마냥 꽃길이 펼쳐진 것은 아니다. 개선되지 않은 채 업계 성장을 발목 잡는 후진적인 문화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기술력에 비해 낮은 가격으로 거래가 이뤄지는 소프트웨어 업계 문화가 대표적이다.

그는 해당 문화가 개선돼야 하지만 완전히 해소될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특정 제도는 문구 몇 자를 바꾸면 되지만 오랜 기간 형성된 문화는 한 번에 바꾸기 힘들다는 이유다.

이 대표는 대신 보안 시장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했다. 글로벌 경제 모델이 구매에서 공유, 구독으로 변화하는 만큼 보안 업계도 이에 맞춘 변화가 필요하다는 요지다. 특히 서비스형소프트웨어(SaaS)로의 변모를 요구했다. 사용자가 소프트웨어를 이용한 만큼 그 비용을 제조사에 지불하는 방식이다.

그는 "구독 기반으로 거래를 하면 구매자는 사용하다가 필요하지 않은 때 구독을 끊으면 되기에 부담을 던다"며 "공급자도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안정적인 수익을 지속해서 얻을 수 있기에 더 낫다"고 강조했다. 지니언스도 해외 시장에 진출하면서 SaaS 기반으로 제품을 선보인 상태다.

지니언스 EDR 소개 영상. / 유튜브 홈페이지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made in Korea’ 자부심 높일 것

"특정 산업이 크기 위해서는 내수 시장도 중요하지만 결국 수출이 주요한 성장 배경이 됩니다. 소프트웨어 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동범 대표는 지니언스가 해외 진출에 큰 관심을 쏟는 배경을 이같이 말했다. 하지만 성장의 가능성이 큰 만큼 어려움도 정비례한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특히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업계 수출에 여러 난관이 많다고 강조했다.

디스플레이와 스마트폰 등의 하드웨어는 삼성과 LG를 비롯한 대기업의 활발한 행보로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라는 브랜드의 인지도와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그에 비해 소프트웨어는 한국의 브랜드를 대표할 기업이 없다 보니 대외 인지도가 상당히 낮다. 자연히 기술력에 비해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지니언스는 이 어려움을 보안 기술력으로 뛰어넘겠다는 포부를 내놨다. 이 대표는 "지니언스는 NAC 분야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업을 해왔다"면서 "기술력에서 충분히 글로벌 경쟁력이 있다는 판단하에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지니언스의 NAC는 사물인터넷(loT)과 5세대(G)에 특화됐다. 지니언스는 이를 ‘디바이스 인텔리전스(Device Intelligence)’라 부른다. 수많은 기기(디바이스)가 연결돼 loT 환경을 이루는 게 5G 시대의 두드러지는 특성인데, 이를 잘 관리하도록 돕는다는 뜻이다. 어떤 곳에 어느 디바이스가 있으며 어디에서 문제점이 발생하는지 등의 디바이스 종합 관리를 맡는다. 기업의 사이버보안에 허점이 생기지 않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이 대표는 "15년 동안 관련 데이터를 모아 갈고 닦았기에 디바이스 탐지 및 분류 능력에서 글로벌 최고 기술을 갖췄다. 최근 유럽의 큰 회사도 지니언스의 풍부한 데이터베이스에 관심을 두고 업무협약(MOU)을 진행 중이다"며 "한국의 보안 회사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가 높은 가치를 인정받도록 해외 보안 시장을 개척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