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양분하고 있는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에서 미국 마이크론이 조용히 존재감을 키운다. 시장 후발주자임에도 경쟁사와 비슷한 시기 기술 로드맵을 세우고, 5세대(HBM3E) 제품 엔비디아 납품을 추진하는 등 영토 확장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엔비디아가 차세대 제품에 6세대 HBM 탑재를 예고한 만큼 선제적 대응 여부가 시장 승부를 가를 전망이다.
6일 업계에 따르면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4일 컴퓨덱스에서 자사 HBM 공급사로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마이크로 3사를 직접 언급했다. HBM 최대 수요처인 엔비디아가 3사를 모두 지목하면서 본격적인 3파전 구도가 형성되는 모습이다.
황 CEO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곳 모두 HBM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라며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이 최대한 빨리 테스트를 통과해 AI 반도체 공정에 쓰일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라고 말했다. HBM3E까지 SK하이닉스가 시장을 주도하는 양상이었지만,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의 테스트 통과 가능성이 언급되면서 맹추격이 예고된 셈이다.
업계에선 6세대 제품인 HBM4에서 3사의 경쟁구도가 격화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엔비디아는 올해 생산할 GPU ‘블랙웰’의 차기 버전인 ‘루빈’을 처음 공개했는데, 해당 GPU엔 HBM4가 탑재된다.
관련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마이크론은 모두 비슷한 시기 HBM4 양산을 계획하고 있다. 마이크론은 내년 상반기 샘플을 공개할 예정이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내년 중 양산에 돌입할 전망이다.
마이크론은 HBM 시장에 뒤늦게 진입했지만, 공격적으로 기술개발에 뛰어들며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현재 10% 미만인 HBM 점유율을 2025년까지 30%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마이크론은 올해 초 실적 발표에서 “HBM3E에서 매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며 “2025년 HBM 생산량 대부분이 이미 판매 계약이 끝났다”고 밝혔다.
마이크론은 선두주자인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추격하기 위해 생산능력 확대 등 인프라 구축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대만 타이중에 HBM 라인을 확충하고, 미국 아이다호 보이시와 뉴욕주 클레이, 일본 히로시마 등에도 HBM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로부터 각각 8조4000억원, 1조7000억원의 보조금을 약속받았다.
국내 인재 사냥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최근 마이크론이 SK하이닉스 HBM 핵심 개발자를 임원으로 영입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는데, 이는 마이크론이 기술 추격 속도를 빠르게 올린 배경으로 지목된다. 업계에선 마이크론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영입한 직원이 수백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삼성전자와 마이크론 HBM이 품질인증 절차를 밟고 있다고 언급했다”며 “삼성전자 HBM 제품에 관해 기술적 보완점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엔비디아 입장에선 급성장하는 수요 대응, 단독 공급처 위험 회피 측면에서 HBM3 납품처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혜원 기자 sunon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