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장사한다고 또 엄청 욕먹겠지요. 어쩌겠습니까.”
최근 한 시중은행 고위 임원이 사석에서 이같은 푸념을 늘어 놓았다. 예금금리는 계속 떨어지는데 반해 대출금리가 꾸준히 오르면서 은행들은 하반기 또 한 번 역대급 실적을 예고해 놓고 있다. 올 상반기 국내 은행권이 기록한 이자이익만 29조8000억원. 이대로라면 올해 연간 60조원을 넘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원인은 시장과 엇박자를 내고 있는 대출금리에 기인한다. 지난 7월 이후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 하나은행, 우리은행, NH농협은행, IBK기업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들은 주택담보대출을 중심으로 20여차례가 넘는 대출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한 달 전 2.84~5.58% 수준이었던 5년 주기형 고정형 주담대 금리는 지난 주말 기준 3.64~6.04%로 집계됐다. 앞자리가 바뀔 정도의 큰 폭의 금리상승이다.
이는 급증하는 가계 대출을 잡겠다고 나선 금융당국이 은행권에 대출 관리를 주문하고 나선 데 따른 것이란 분석이다. 지난달 초 금감원은 국내 은행 부행장들을 불러 ‘은행권 가계 부채 간담회’를 갖고, “현장점검을 실시할 것”이라며 “지적사항에 대해 엄중 조치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이후 각 은행별로 경쟁적으로 대출금리 인상 러시가 벌어진 건 주지의 사실이다. 대출금리 줄인상만으로는 가계대출 급증을 막는게 어려워지자 이제는 전세자금대출과 신용대출 등 다른 대출상품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높아진 은행 문턱에 생활비 한 푼이 아쉬운 서민들만 좌절하고 있다. 시장금리와 어깨를 맞추다 보니 은행권 예금금리는 한국은행 기준금리(3.5%) 보다 낮아진 상황. 들어오는 돈은 계속 줄어드는데 물가는 오르고 대출금리까지 오르니 내 집 마련은 고사하고 당장 다음달 이자내기도 빠듯하다.
행복한 고민을 해야 할 은행권도 죽을맛이다. 지금의 이자이익은 경기가 좋아서도, 은행이 영업을 잘해서도 아니다. 한국은 물론, 미국을 포함 글로벌에서도 높아지는 금리인하 기대감에 시장금리는 조금씩 낮아지는 상황. 예금금리를 내리면서도 가계대출을 잡으라는 당국의 주문에 대출금리를 올려야 하는 은행들은 뒤이어 또 어떤 지시가 내려올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사실 가계대출 급증의 원인도 따지고 보면 당국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연초부터 온갖 정책금융 상품을 쏟아내고, 대환대출까지 풀어주면서 가계부채 관리의 빗장을 열어 버린건 당국이었다. 7월 도입 예정이었던 스트레스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2단계 규제를 9월로 미룬 것도 시장에는 '대출을 받으라'는 시그널로 작용했다.
이런 시장과 따로 노는 뒷북 대출규제는 하반기 내내 우리 경제에 적지않은 부담을 줄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한국은행은 8월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 집값 상승과 가계부채 증가 안정을 전제로 금리인하 시그널을 내비쳤다. 예대금리는 더욱 벌어질 것이고, 서민 부담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연초 기업가치를 높이겠다던 밸류업 정책은 금투세 폐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표류 중이다. 여기에 손태승 전 우리금융 회장의 친인척 부당 대출, 티몬·위메프 환불중단 사태, 카카오페이의 고객정보 유출 등은 금융당국의 정책 신뢰도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하다.
급작스런 대출규제의 기저에는 은행을, 그리고 시장을 소통이 아닌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인식이 깔려있다고 본다. 손쉬운 관치금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십수년째 국내 자본시장의 선진국 지수 편입을 말로만 외치는 한국 금융의 현주소가 안타까울 뿐이다.
손희동 금융부장 sonny@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