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통칸싸랑반치 하.나.이.지."
태국인 큐(26)씨가 자국말인 태국어로 이렇게 말하자, 창구 앞에 앉아있던 한국인 직원이 "신분증이나 여권 주세요"라고 답한다. 충남 아산에서 직장을 다니는 큐씨는 한국에 온지 이제 1년, 아직 한국말이 서툴다. 경기도 평택에 한국말을 몰라도 은행업무를 볼 수 있는 외국인 점포가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한 걸음에 달려왔다.
우선 거래를 하려면 하나은행 거래 계좌가 필요하다. 모바일 거래가 필수인 만큼, 해외 송금 전용 앱인 하나이지를 설치해야 한다. 그가 창구에서 태국어로 "하나이지 계정을 만들고 싶어요"라고 말했고, 인공지능(AI) 통역기를 통해 해당 요청이 한국어로 창구 직원에게 전달됐다.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대화하지만 은행 업무를 처리하는데 문제는 없다. 창구마다 설치된 인공지능(AI) 통번역 기기가 마이크로 입력된 대화 내용을 실시간으로 번역해 각자 태블릿에 띄워주기 때문이다. 굳이 태블릿을 볼 필요도 없다. 직원과 큐씨 사이에 설치된 투명 디스플레이에 번역 내용을 메신저 형태로 실시간으로 떠 서로 얼굴을 보며 상담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는 “이전에 갔던 은행들은 실시간 통번역 서비스가 없어 구체적인 요청을 못했다”며 “이번 기회에 못했던 업무를 처리하고자 아산서 지하철을 타고 왔다”고 말했다.
22일 하나은행이 평택에 문을 열었다는 외국인 전용 특화점포 평택외국인센터점을 찾았다. 19일 문을 연 이곳은 평일은 물론, 휴일에도 운영된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평일 은행 업무를 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에 착안했다.
현재 ▲IBK기업은행▲KB국민은행▲우리은행▲하나은행▲전북은행 등 5개 은행이 전국 32곳에 외국인 특화 점포를 운영 중이다. 이 중 하나은행이 절반인 16곳을 차지할 정도로 외국인 고객 유치에 진심이다. 지난 5월말 기준 올해 5대 시중은행 신규 외국인 고객 수 중 40% 가량을 하나은행이 유치했다.
외국인 특화 점포는 국내 체류 외국인 전용 금융 서비스를 제공한다. 통상 평일 영업시간 방문이 어려운 경우가 많아 오후 늦게 또는 주말에도 문을 연다. 이번에 새로 개점한 하나은행 평택외국인센터점은 평일 외에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고객을 맞아 접근성과 편리성을 높였다.
평택 지점 현장에서 만난 김상봉 하나은행 외국인근로자마케팅팀장은 “하나은행은 2012년 KEB외환은행 인수 당시 얻은 외국인 고객들의 구전 효과로 고객수가 계속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잠시 주춤했던 국내 체류 외국인 수가 다시 늘기 시작하면서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외국인 계좌 가입자는 지난해 말 기준 571만1893명으로 2019년 대비 15% 늘었다. 올해에도 지난 5월말까지 15만명이 신규 유입되는 등, 국내 은행 외국인 고객 증가세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개점 첫 주 주말인 22일 방문한 하나은행 평택외국인센터점은 오전부터 외국인 고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들의 왁자지껄한 다양한 언어로 마치 해외 어딘가에 온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이들은 주로 은행 앱 가입, 계좌 개설, 해외 송금 등을 위해 방문한 고객들이다.
지점 내 근무하는 청원경찰은 들어오는 고객마다 “Do you have an ID card?(신분증 있나요?)”라며 대기표를 건네고 하나은행 본사에서 파견된 직원은 대기 번호를 외치며 외국인 고객을 창구로 안내했다.
이날 하나은행 평택외국인센터점에는 안내 직원 3명과 창구 직원 5명 등 총 8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창구 직원 중 2명은 베트남 국적의 외국인이다. 김상봉 팀장은 “이곳 외국인근로자는 동남아, 특히 베트남 국적 비중이 높다”며 “해당 직원들은 여신 업무를 제외하고 한국인 직원들과 동일한 업무를 수행한다”고 설명했다.
AI 통번역 최초 도입 평택점 “향후 보급 늘릴 것”
팬데믹 이후 비대면 금융 서비스가 활성화됐지만 기존 국내 금융 서비스를 이용해보지 않은 외국인들은 아직 오프라인 창구 이용률이 높다. 이날 방문한 한 베트남 고객은 “아침 8시에 왔는데 이미 사람들이 많아 지금 3시간째 기다리고 있다”면서도 “한국 내 은행은 직원들이 알아서 해줘서 이용하는데 딱히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오프라인 서비스 수요가 높은 이들을 위해 AI 통번역 기기를 이번 평택 지점에 최초로 도입했다. AI 기반 통번역 시스템은 타 은행에도 있으나 외국인 특화 점포에 도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한 기존 5개~15개의 언어를 지원하던 것과 달리 이번에 도입된 기기는 영어, 태국어, 말레이어를 비롯해 총 38개 언어를 지원한다.
다만 AI 통번역 시스템은 아직 시범 운영 수준이다. 현재 평택 지점 내 통번역 기기는 4대, 투명 디스플레이는 1대만 운영 중이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AI 관련 기기는 비용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도 “평택 지점에 시범 운영 후 차차 보급을 늘려갈 계획”이라 밝혔다.
외국인 고객에게 은행 업무를 다국어로 알려주는 디지털 기기가 있었으나 국내 금융 서비스 자체가 처음인 외국인 입장에서는 이용이 쉽지 않아 보였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안내 직원도 “대기표를 받고 창구에 가기 전에 미리 서류를 안내할 수 있는 기기가 있으나 대부분 어려워 해 그냥 기다렸다 창구로 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체류 외국인 ‘사랑방’ 거듭난 은행…“모든 광역자치단체 개점 목표”
평택센터가 편리하다고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이 난 모양이다. 여기서 은행 업무를 보겠다고 평택 뿐만 아니라 타 지역 체류자들도 다수 보였다. 2년 전 네팔에서 와 용인에서 창호 설치 일을 하고 있는 푸크렐(40)씨는 “이전에는 안산에 있는 기업은행으로 갔었다”며 “이번에 여기가 새로 열었고 친구도 여기로 온다길래 계좌도 개설할 겸 왔다”고 말했다.
실제 평택외국인센터점에는 단체로 방문한 외국인 고객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에서 정보를 얻을 창구가 한정된 외국인들이 특정 커뮤니티에서 결집해 함께 방문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긴 대기시간에 넓은 대기 공간 내 마련된 소파와 탁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방문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김상봉 팀장은 “국내 체류 외국인들은 각자 커뮤니티 내 입소문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특정 지점에 같이 방문하는 경우가 많다”며 “은행 외국인센터점이 일종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셈”이라 말했다.
이어 그는 “최근 계절근로자 제도 등으로 외국인 밀집 지역이 추가되고 있다”며 “향후 강원도와 제주도 등에 추가로 개점해 모든 광역자치단체에 외국인 특화 점포를 놓는 것이 목표”라 밝혔다.
김홍찬 기자 hongchan@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