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병원은 안 돼요. 시스템이 안 들어와서요” 

밤새 고열과 몸살에 시달리다 오전 문 여는 시간에 맞춰 가까운 병원을 찾았다. 진료를 받고 수액도 맞고 이런저런 처치를 하다보니 비용이 제법 나왔다. 병원 밖을 나서려다 문득 실손24(실손보험 청구 전산)가 떠올랐다. 보험금 청구라도 편하게 해볼까 싶었지만 병원 측의 반응은 냉랭하기 그지 없었다.  

복잡한 실손보험 청구를 간편하게 도와주는 실손24가 도입된 지 반년이 넘었지만 참여 의료기관 확대 속도는 여전히 더디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현재 실손24에 참여하고 있는 의료기관(보건소 제외)은 540여개로 전체 대상 병원 4230여 곳의 13% 수준이다. 지난해 실손24 오픈 당시 연말까지 전체 참여 병원을 60%까지 확대하겠다는 금융당국 포부가 무색할 정도다.

특히 실손 청구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일반병원 참여율이 저조하다보니 소비자 불만이 상당하다. 일반병원은 전체 실손 청구 건수의 33%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지만, 참여 병원은 400여곳에 불과하다. 

1차 의료를 책임지는 일반병원의 경우, 대부분 소액 진료인 만큼 복잡한 실손보험 청구 절차에 보험금을 포기하는 환자들이 적지 않다. 연간 약 2800억원에 달하는 실손보험금이 청구되지 않고 버려지는 이유다.

그나마 실손24에 참여한 병원도 약제비 청구는 따로 진행해야 해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일일이 약제비 청구서를 사진 또는 스캔해 보험사에 첨부해야 한다. 소비자 입장에선 큰 변화를 체감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보험개발원은 약제비 청구 서비스를 이달 중순부터 시행할 예정이지만, 이마저도 처방전에 적힌 약국이 아닌 경우 약제비 청구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금융당국이 오는 10월부터 전국 7만여개 의원과 2만5000여개 약국까지 적용 대상을 확대한다고는 하나, 지금같은 병원급 기관의 참여율로 볼 때 소비자 편익이 높아질거라 보기 어렵다.  

실손 청구 전산화가 이토록 더딘 이유는 의료계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의료계는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과 보험 청구 시스템을 연동하는 데 따르는 운영 비용을 보험사가 추가 부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보험사들은 기본적인 전산 구축 비용을 이미 부담한 만큼 추가 운영 비용을 지불하는 것에 난색이다. 

또 병원 측은 도수치료나 각종 주사 등 민감한 비급여 진료 항목이 전산화로 인해 노출될 가능성에 대해 우려한다.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빌미로 활용할 수 있다는 주장인데, 사실상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병원들이 불필요한 의료쇼핑을 부추겼다고 자인하는 꼴이 될 수 있어서다.

실손보험은 국민 4000만명 가까이 가입한 ‘제2의 건강보험’이다. 민간이 의료비 부담을 나눠 공공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핵심 장치다. 실손 청구 전산화는 제도 실효성을 높이고, 환자가 겪는 불합리한 불편을 줄이기 위한 필수 과제다.

그럼에도 의료계는 전산 연계 비용과 민감 정보 노출 가능성을 이유로 참여를 꺼리고 있다. 보험업계 역시 추가 부담을 회피하며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 사이 환자들은 보험금 청구를 포기하거나 불필요한 절차에 시달리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실손 청구 전산화는 기술의 문제가 아닌 의지의 문제다. 이해관계자 모두 국민 편익이라는 본질적 가치를 중심에 두고 실질적인 대책을 내놔야 할 때다. 

전대현 기자
jdh@chosunbiz.com